옵.신 7호 Other.scenes 「마르크스/레닌/드보르(1867/1917/1967)」 발췌
옵.신 7호 Obscene/Other.scenes
마르크스/레닌/드보르(1867/1917/1967), 스펙터 프레스, 2017
pg.15
예술적 재능이 특정한 개인에게만 배타적으로 집중되는 현상과 이에 종속된 대중에게 주어지는 억제는 노동의 분할로부터 기인한다. (...) 공산주의 사회에서 '화가'는 사라진다. 기껏해야 여러 예술 영역 중에서 그림도 그리는 사람들 정도가 있을 뿐이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1846)
pg.16
화폐의 속성은 나의--화폐 소유자의--속성이요 본질력이다. 따라서 나의 존재와 능력은 결코 나의 개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
화폐는--외적인 인간으로서 인간, 사회로서 인간사회에서 유래하지 않는 보편적--표상을 현실로, 현실을 단순한 표상으로 만드는 외부적이고 보편적인 매개 수단이다.
-카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 (1844)
pg.26
증권거래소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생산의 가장 걸출한 대표가 되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주식회사의 형성을 통해 일어났다. 예를 들어 뤼미에르 가문은 불과 3년 전 가족 사업을 그와 같은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마르크스의 자본의 일반 정식에서 핵심에 위치한 것은 공장이다. 원료와 노동력과 설비의 조합을 통해 공장에서는 화폐가 일군의 상품으로 전환된다. 소유자에게 일이 잘 풀리면 이러한 상품들은 수익을 남길 만큼 팔린다. 엥겔스가 서술한 전환에서 공장의 위치가 증권거래소로 넘어갔다. 물론 공장은 여전히 있지만 더는 자본 축적의 핵심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일반 정식이라고 말한 것은 여기서 마르크스가 '의미 없는 축약'(meaningless abbreviation)이라고 말한 것으로 바뀐다. 더 많은 돈을 버는 돈 말이다. "이제 자본은 자기 증식을 위한 신비하고 자기 창조적인 원천으로서 나타난다." 이제 노동자는 현장을 떠난다.
-재커리 폼월트, <언서포티드 트랜싯> (2011)
pg.31
「정치경제학 비판」 의 어느 각주에서 마르크스는 세계혁명, 사회주의 혁명을 예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세계시장에 도달할 떄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려 했던 바는 세계 전역에서 점차적으로 모든 다른 노동 형태들이 임노동으로 대체되고 그 결과 그들이 생산하는 이윤이 (잉여가치를 통해) 자본으로 대체되었을 때를 뜻합니다.
(...) 물론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쓴 「공산당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는 혁명적인 재구성인가 아니면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인가"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닙니다. 사회주의는 불가피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과 정치적 실천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레드릭 제임슨, 인터뷰 (2012)
pg.37
돈은 실제 상품의 기호이고, 신용은 기호의 기호일 뿐인데도요. 금과 은, 그러니까 진짜 돈은 본래 한도가 있지만, 신용에는 한도가 없고 따라서 신용 규모, 그러니까 돈에 대한 약속은 실제로 존재하는 돈과 더는 정확히 맞지 않는 수준이 되었던 겁니다. 실제 상품과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제도에서 중력이 모든 구조물을 땅에 떨어뜨리는 만큼이나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정기적이고 잦은 위기가 필연적으로 찾아왔죠.
-에드워드 벨러미, SF 소설 「뒤돌아보며: 2000년에 1887년 가을」 (1888)
pg.39
순수한 내면 혹은 자기 동일시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순수함은 언제나 외부에 의해 침투되며 외부의 내투사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이는 곧 예술 체험의 자체 완결성이나 매체의 순수함, 혹은 당연히 여겨지는 특정 학술 체계의 독립성을 무화하는 주장으로 커졌다. 자기 동일시는 자기 분화로 드러나고 분해되었다.
(...) 이론은 "그것이 생산된 기존 실서에 대한 광고"로 축소되고 드러날 뿐이다. 이러한 비판에 의하면, 하나의 이론이 문화 산업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론은 결국 바로 그 산업을 홍보하는 형태가 되고 만다.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그 어떤 것이라도 도용하고 재구축하는 자본주의야말로 궁극의 전용의 거장인 게다. 브로타르스는 (...) 이론과 문화 산업은 공모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제도 비판'은 그것이 성공의 지지기반으로서 의존하게 되는 바로 그 국제적인 마케팅 제도에 결국 흡수되고 만드는 것을 예견하였다.
-로절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2000)
pg.48
왜 동유럽으로 여행을 가느냐고?
(...) 나는 "아직 시간이 있을 때"라고 말했다.
무얼 할 시간? 왜? 서구의 '침략'이 너무 노골적이 되기 전에?
마치 '이전'과 '이후'가 있는 것처럼, 말하자면 빙하기 이전과 이후, 혹은 냉전의 이전과 이후... 이미 실현된 유토피아와 붕괴된 유토피아. 혹은 앞으로 다가올 유토피아? [...]
-샹탈 아케르만, 「<동쪽>에 관해」 (1995)
pg.55
자본과 제국주의 전쟁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관련을 설명하는 것, 자본을 쓰러뜨리지 않고는 폭력이 강제한 평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민주적인 평화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블라디미르 레닌, 「4월 테제」 (1917)
pg.57
<겨울 궁전 습격>은 10월 혁명 3주년을 기념하는 1920년 11월 7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실제 겨울 궁전에서 이루어졌다. 3년 전 이 사건에 가담했던 실제 인물들이 본인을 연기하도록 초청되었다. 8000여 명의 퍼포머가 참여하고, 500명이 넘는 음악인이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1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차르 궁전 밖 광장에 운집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거친 숨을 쉬며 이 스펙터클을 관람했다.
-로버트 리치, 「혁명 연극」 (1994)
pg.61
예술은 삶의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은 우리가 사물을 느끼도록 하고, 돌을 돌답게 만든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의 감각을 이해하는 대로가 아닌 지각되는 대로 전하는 것이다. 예술의 기법은 사물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빅토르 시클롭스키, 「기법으로서의 예술」 (1917)
pg.78
영화 <자본>을 위한 첫 예비적인 구조 초안은 완벽하게 무관한 사태의 진부한 전개 과정을 취할 것이다...그리고 이 연쇄의 계기들은 오직 개념들의 유희만이 있을 수 있을 연상들을 형식화하기 위해 그 출발점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연상 작용은 자극을 전제한다. 일련의 자극을 부여할 것. 그게 없다면 연상할 것도 없을 것이므로. 확대되는 관념들의 최대 추상성은 특히 극단적인 구체성--삶의 진부함--의 산물로서 제시될 때 특히 대담해 보일 것이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영화 <자본>을 위한 노트」 (1927)
pg.79
제이 레이다는 <행복> 말고도 1930년대의 엄청난 영화 실험을 언급한다. '영화 기차'다. 카메라, 현상 장비, 편집 장비, 상영 장비 외에 배우까지 기차에 싣고 달리며 공장의 노동자들, 콜호스(집단 농장)의 농부들 등 현지인들과 협업하는 전무후무한 '기찻길 영화'를 만드는 기획이다. 하루 동안 촬영하고 밤에 현상, 다음날 편집을 완성하여 참여했던 사람들과 상영회를 갖는 것이다.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공식적인 프로파간다를 민중에게 실어 나르는 대신, 민중이 곧 스튜디오가 되는 거다.
(...)
메드벳킨에 관해 많은 질문을 안게 되었다. 기차에서 행동의 자유를 확보한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지만, 하부의 인민들은 그의 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싫든 좋든, 그의 팀은 노동 계층이 적대적으로 여겼던 중앙 권력 집단의 상징으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중앙당의 기본 방침을 민주적인 장막으로 가리려는 시도에 유린되지는 않았을까? 그들은 언제, 어떻게 타협해야만 했을까?
-크리스 마르케 <마지막 볼셰비키> (1990)
pg.87
(1917년) 예술 제도를 타파하고 일상의 현실을 거대한 스펙터클로 전환하려는 유토피아적 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공 가능성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후 정황은 예술, 문화 영역의 극심한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이어졌고, 유토피아의 비전은 수정되거나 완전히 폐기되어야만 했다. [...] 현실 속에서 실현이 불가능해진 혁명적 정치 행동은 예술의 주제가 되었다. [...] 1917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나자, 혁명은 공식적으로 신화화되기에 이르렀고, 예술은 당시 형성되고 있던 스탈린 정권이 주조한 역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라르스 클레베리, 「행동으로서 연극」 (1993)
pg.88
교환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점점 심화되는 분업은 사회적 경험의 파편화와 지식의 전문화로 귀결되었다. 기술 과학은 곧바로 다양한 생산 분야에 부합했다.
(...) 전문화는 노동과 인식의 발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전문화 덕분에 경험의 각 영역에서는 점점 더 많은 자료가 계속해서 쌓이고, 방법들은 이전에는 인식할 수 없던 완성도와 치밀함을 갖추게 된다.
(...) 전문화는 지식의 통합으로 나아가는 경향과는 모순 관계에 있다. 전문화는 경험을 조각으로 부수고, 각각의 조각들은 독립적으로 조직된다. 결과적으로 동시대의 과학을 특징짓고 있는 극히 중요한 두 가지 부정적 현상이 나타난다. 자료의 과잉 축적과 인식의 이질적인 방법들이 그것이다.
(...) 과학자들이 두 가지나 세 가지 전문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영역 안에 고립되고, 그 영역 바깥에서는 가장 적응력이 떨어지는 취약한 사람으로 변한다.
pg.91
그러나 전문화가 여전히 지배하는 한, 과학의 통합은 불가능하고, 사회적 경험은 파편화되어 전체로 조직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의 필요성이 대두한다.
정확히 말해 철학은 전문화의 힘에 의해 분할되고 분해된 것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철학의 의미이자 중요성이다. 이것은 철학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pg.92
현실적으로, 인간의 실천에서 사회적 경험은 원자화되어 있다. 현실이 분해해 온 것을 철학적 구축을 통해 결합하고 연결하는 일은 가능한가? (...) 철학은 전체라는 자신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사회와 그 경험이 전체로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환 사회가 절대적으로 무정부적인 체계인 것은 아니며, 분업이 사회 전체가 완전히 분리된 개별적 단위들로 와해되었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은 발생한다. 전문 분야들은 그들 간에 어떤 접촉도 없을 만큼 제약된 것은 아니다. 경험의 집단적 조직화는 창출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혹은 사회라는 말이 그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pg.93
교환 사회의 역사적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사회적 인간존재의 분리와 그 똑같은 인간존재의 결집--두 가지 대립되는 경향을 보여 주는--은 동시에 발생했다.
pg.94
철학에 가장 슬픈 운명이 닥치는 순간은 전문화의 힘이 완전히 지배하면서 그것이 일종의 철학자 길드, '전문성을 지닌 속물'을 창출하는 때이다. (...) 이러한 개인들 각자는 (...)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경험의 방부 처리된 차가운 시체들을 읽는다. 최고의 지혜는 한 올의 머리카락을 네 부분으로 쪼개는 최고의 방법에 놓여 있다고 가정되는 내내 이러한 시체들은 구획 지어지고 학자풍으로 조사되고 작은 조각들로 절단된다. 그 뒤에 그들은 그 단편들과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꿰매어 새로운 책을 만든다. 그 새로운 책은 자연스럽게 시체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만, 시체는 원래 한때는 살아 있는 신체였다는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pg.95
철학의 위대한 대가들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시대의 지식에 대해 해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대다수는 실천적인 삶과 투쟁으로 점철된 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경험을 전체로 조직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객관적으로 완전한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간 사유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었다.
pg.97
기계를 다루는 누군가의 주요 업무가 감시 장치와 기록 장치가 알려주는 특정 상태를 관찰하고 비교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조절 장치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일 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적합한 과학적 지식의 도움으로 이루어질 때, 노동자와 엔지니어 간의 어떤 질적인 차이는 사라지고 준비성과 숙달에서의 양적인 차이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노동은 하나의 유형으로 환원될 것이다. 전문화에 의해 실제로 생산된 극심한 차이들은 제거될 것이며, 분업이 인류를 파편화시키는 일도 그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대상들을 상대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일의 단순한 분배가 남게 될 것이다.
pg.98
전문화는 인구 대중이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이는 경쟁을 줄이면서 자신들의 수입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 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반해 실천적으로 전문화를 극복해 나가고 있는 노동계급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그 동일한 과제에 착수할 수 있으며 또 착수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자기 이해관계의 문제이다.
(...) 사실 모든 인간 활동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조직화의 과정이 그것이다.
(...) 세계의 기본적인 삶도 다양한 유형과 차원의 조직화를 위한 투쟁 및 발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 활동은 그것을 구체화하고 인간이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해주는 세계의 활동과 구별할 수 없다. 따라서 조직화 방법에 관한 과학은 자연이 이룬 방법들을 포용하고 동시에 그 자체의 조직화 형태를 완성해야 한다. 보편적 방법론, 이것이 이 미래 과학의 본질이다.
(...) 모든 과학은 보편적인 포괄적 과학--가설적이고 논쟁적인, 철학처럼 동요하는 과학이 아니라 정확하며 철저하게 경험적인 과학--에 의해 인도될 것이다.
(...) 그러나 이 외에도 지금 이미 보편적 조직 과학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구체적인 증거들이 있다.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서로 완전히 독립해 있고 때로는 상이한 존재 영역에 속해 있는 형체나 결합체를 창조하는 데 자연이나 인류 혹은 둘 모두가 동일한 방법을 적용하는 경우들이다.
pg.103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은 이것이다.
일반적인 방법들과 자연적 규칙성들은 존재하며, 그것들을 따라 우주의 가장 다종다양한 요소들은 복합체들로 조직된다.
이 명제는 철학의 역량 너머에 있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으로부터 이어받을 새로운 위대한 과학의 토대를 제공한다.
pg.104
보편적인 새로운 과학의 토대는 가까운 미래에 단언될 것이다. 이 과학은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고 인류 역사의 고통스러운 서막을 자신의 결말로 가져갈 저 거대한, 신열에 들뜬, 조직적인 노동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나 만개할 것이다. 그 시간은 머지않았다.
-알렉산더 보그다노프, 「미래의 과학」 (1911)
pg.106
민주주의가 완전해지면 완전해질수록 민주주의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무장한 노동자들로 구성되고 '더는 고유한 의미로서 국가'도 아닌 '국가'가 점점 민주적으로 될수록 점점 더 급속하게 모든 형태의 국가는 소멸되기 시작한다.
-블라디미르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pg.108
사이버신(cybersyn)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의 인공지능 사회주의 프로젝트
pg.111
그러나 [월마트에는] 루스벨트 시대의 트러스트나 독점자본보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집중화와 후기 자본주의의 독점 경향을 체화한 것이 있다. 하지만 훈수꾼들이 관측하듯이 이러한 기업의 등장--새로운 바이러스 혹은 새로운 종처럼--은 예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유례없고 현재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사유의 범주들에도 저항한다.
(...) 월마트가 대표하는 새로운 현실의 변증법적 성격은 또한 사업 운용에 관해 보편적으로 감지되는 상당한 양가감정의 원천이다. 인플레이션을 축소하고 물가를 억제하고 나아가 보다 낮추며 가장 가난한 미국인들조차 구입할 여력을 갖게 하는 월마트의 능력은 또한 그들의 빈곤의 원천이자 미국 산업 생산성을 와해하고 미국 소읍 생활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는 주범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했던 (....) 것처럼, 이는 역사적으로 독특하면서도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 자체의 변증법적 역학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변증법은 도덕적이지 않다. (...) 그리고 그럴 경우 도덕화란 다른 무엇을 떠올리지 못한 채 이 악을 비난하는 너스레를 떨고 싶어하는 것이다.
pg.113
바코드의 유토피아적 특성은 인간 주체 사이의 인터넷과 같은 것으로서 스스로를 상품들의 세계에 투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생산으로부터 분배로의 지배의 전환은 상당 부분 사회 영역에서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등장에 상응한다.
하지만 물질적 대상이란 측면에서, 물류 혁명만큼이나 근본적이지만 또 그와는 상당히 상이한, 또 하나의 관련된 발전이 있다. 그것은 콘테이너화(containerization)의 발명과 부상이다. (...) 생산과 소비 사이의 매개 그리고 분배와 소비 간 대립의 종국적인 폐지를 대표한다.
pg.114
나는 변증법 자체의 양가성, 특히 기술혁신과 관련해 어떤 것을 추가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먼저 레닌과 그람시가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를 숭배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근로 생활에서 가장 착취적이고 비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혁명가들의 편애를 보여 준 것이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유토피아적 여기(Utopian here)가 뜻하는 바, 즉 현재 부정적인 것은 또한 유토피아적 미래의 원자가들(valences)인 그 어마어마한 변화 속에서 긍정적으로 상상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이른바 사고실험으로서.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의 원자가」 (2009)
pg.131
유권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유롭게 자신들의 부자유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은 부르주아지들의 오래된 속임수다. 자신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식이다. 악보를 읽는 법도, 피아노를 치는 법도 배울 수 없었던 사람에게 아무 건반이나 두드려보라는 선택의 자유를 주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브레히트
pg.150
현대의 생존 시간은 그 사용가치가 축소될수록 스펙터클을 통해 그만큼 더 큰 목소리로 자화자찬한다. 시간의 세계가 시간의 광고로 대체된다. (154)
스펙터클은 역사와 기억응ㄹ 마비시키고 역사를 유기하는 현재의 사회조직이다. 스펙터클은 역사적 시간의 토대 위에 건립되는 시간의 허위의식이다.(158)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1967)
pg.151
미학적 성공의 정도는 지속과 분리할 수 없는, 심지어는 영원을 주장하기도 하는 어떤 아름다움에 의해 측정된다. 상황주의의 목표는 단호하게 마련된 극히 짧은 순간들의 변주를 통해 격정적이고 충만한 삶에 즉각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들의 성공은 오직 그것들의 일시적인 효과로서만 있을 수 있다. 상황주의자들은 총체성의 견지로부터 문화적 활동을 일상의 삶을 구축하는 실험적 방법으로 간주하며, 이는 여가의 확대와 분업의 소멸을 통해 영구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기 드보르, 「문화혁명에 관한 테제」 (1958)
pg.154
다양한 예술인이 오늘날 '세계화'라는 온건하고 무의미한 단어와 동일시되는, 기업 중심의 후기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극심한 확장주의 체제 아래에서 예술 생산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이들은 대기업 문화의 국제화가 타협적인 정체성 형성이라는 신화적 모델로 문화를 퇴각시키는 것 말고는 욕망하는 바가 없음에 따라, 국가 이데올로기와 통상적인 정체성 구축의 방식이 더는 의미 있는 문화 생산을 지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정확하게 통찰한다.
(...) 하지만 세계화는 변화의 한 요소일 뿐이다. 적어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기술의 발전이다.
(...) 두 번째는 좀 더 복잡한데, 음모론처럼 들리지 않게끔 이를 말하는 건 매우 어렵다. '예술인'과 '지식인'의 대립 구도가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문화 생산에서 이는 실질적이다. 문화 생산은 이제 나름의 방식을 따르는 투자와 투기에 의한 경제적 장으로 획일화되었다. 예술인과 지식인, 나아가 예술인과 자본 생산 사이의 이율배반 관계가 종식되거나 자연 감소해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아직 전체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반박과 갈등의 소거를 지향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완전하게 진전된 자본주의 조직의 전체주의적인 조건 아래에서 문화 생산이 무엇인가에 대해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냐민 부흘로 외, 「동시대 미술의 곤경」 (2004)
pg.159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동화의 확대로 생산에 필수적인 노동량이 감소하면 노동과는 상이한 행위인 여가에 대한 수요와 그 본성에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공간이 최소한도로 축소되는 정원 도시 개념과는 반대로, 사회적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집단 거주지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로 이어질 것이다. 미래의 도시는 기둥들이 떠받치는 연속적 구조물 혹은 다양한 구조물이 연장되는 체계로 생각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생활이나 쾌락 등을 위한 건물, 나아가 생산과 분배를 위해 고안된 건물은 공중에 매달리고, 사회적 교류와 공적인 회합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땅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콘스탄트 니우에하위스, "다른 삶을 위한 다른 도시" (1959)
pg.162
힐런: 그렇지만 현재로 시간을 이동해 보면, 상황주의자들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폐와 이민자들의 흐름으로 이뤄진 도시는 과거의 상황주의자들에겐 분명히 악몽이겠지만 어쨌든 유동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면역(immunity)이지요.
콜하스: 제가 말하려는 게 바로 그겁니다. 시장경제, 그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것의 정반대가 그들이 비판하려 했던 도시의 직선, 계획 그리고 구성에 대한 대안처럼 도시를 비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상황주의자들이 뜻하지 않게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로 인해 정치적인 포부는 이제 덜 미더워졌습니다. 알다시피 전혀 상반된 체제가 정확히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파스칼 힐런, "렘 콜하스와 파스칼 힐런, 콘스탄트 니우에하위스를 논하다" (2015)
pg.166
정의는 언제나 열려 있으며 결코 최종적이지 않다. 우리의 낱말은 오직 어떤 정확한 역사적 실천과 연관해서만, 역사적으로 어떤 한정된 기간 동안에만 가치가 있다.
세계를 감추고 보호하는 언어를 제거하지 않고, 그런 언어의 진실을 폭로하지 않고서 세계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이 끝없는 곡해이자 '사회의 진실'인 것처럼, 언어는 권력의 변함없는 안전장치이며 사전은 권력의 만능 참조물이다.
pg.167
지배 언어에 대한 비판, 지배 언어에 대한 전용(détournement)은 새로운 혁명 이론의 지속적인 실천이 될 것이다.
모든 새로운 의미는 권위자들에 의해 오독이라고 일컬어지므로, 상황주의자는 오독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권력이 제공하고 보장하는 그 의미의 기만을 고발할 것이다. 사전은 현행의미에 대한 감시자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파괴할 것을 제안한다.
pg.170
-[다다이즘]의 실패. 나중에 예술학파와 그 주인공들에 이르렀을 때, 다다이즘은 시작(詩作)의 공허함에 대한 문학적 표현, 나날의 자유의 공허함을 표현하는 예술이 되었다. 박탈당했던 "모든 것을 말하기"라는 이 예술의 궁극적 표현은 빈 페이지이다. (...) 근대의 (실험적인, 순열 조합의, 공간적인, 초현실주의의, 네오다다이즘의) 시는 시의 대립물이다. 그것은 권력에 의해 교화된 예술 기획이다. 그것은 시의 성취 없이 시를 폐지한다. 그것은 계속되는 자기-파괴에 의존해 살아간다. 막스 벤제가 서글프게 시인하듯이, "더는 말할 것이 없을 때, 언어를 구제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관료주의가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관리하고 장악하는 곳에서, 권력은 언어를 공격하고 시를 정보라는 평범한 산문으로 환원한다.
pg.173
-우리는 언어의 참된 해방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를 모든 족쇄로부터 해방된 실천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언어적인 것이든 아니든, 우리는 모든 권위를 거부한다. 오직 현실의 삶만이 의미를 허용하고, 오직 실천만이 진리를 허용한다.
-그러므로 옛 세계의 모든 범주가 정당화된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언어에 맞서 우리 자신의 언어, 현실적 삶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스타파 카야티, "포로가 된 낱말" (1966)
pg.179
-전복의 잠재적 가능성은 예술의 본성 자체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 어떻게 현실로 표현될 수 있는가? 즉 예술로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고, 내적인 전복의 힘을 잃지 않고 어떻게 그것이 변혁의 실천에서 하나의 요소, 하나의 지표가 되도록 표현할 수 있을까? 미적 형식을 살아 있는 '현실적인' 무엇, 그것도 기성 사회를 초월하고 부정하는 무엇으로 대체하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예술은 관념에 관여하며, 개별적인 것에 있는 보편적인 것에 관여한다. 이 관념과 현실, 보편과 개체의 긴장 관계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듯한 천년왕국까지 존속될 것으로 여겨지는 탓에 예술 역시 소외에 머물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이 소외 때문에 예술이 대중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 없어진다면, 이는 대중을 만들어 내고 영속시키는 계급사회 탓이다. 계급사회가 대중을 '자유롭게 연합된' 개인으로 변화시킨다면, 그때 예술은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잃을테지만, 예술의 사회적 소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기장 관계는 예술과 형멱적 실천의 어떤 동일화도 저지한다. 예술이 혁명을 대행할 수는 없다. 예술은 다만 다른 매체, 즉 정치적 내용을 메타 정치화하는 미적 형식--예술의 내적 필연성에 지배되는--에서 혁명을 환기할 수 있을 뿐이다.
pg.180
예술의 운명은 혁명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들을 거리로 내보내는 것은 실제로 예술의 내적 요구이다. 해방의 역사적 기회가 있는 모든 혁명을 위해 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길거리에 나서는 예술가는 예술 세계에서 나와 예술이 적대적 일부가 되는 더 큰 세계, 급진적 실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예술과 혁명" (1972)
pg.194
문화 실천이 포드주의적 분배 양식과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 형태 사이에--파일 공유와 유료 사이트 사이에, 운동가-예술가 네트워크와 거대한 스테인리스 강철 조각을 위한 맥구겐하임 건설 사이에--갇힌 역사적인 시점에, 문화혁명 개념은 우리의 현재를 구성하는 이율배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주장은 그 개념이 가장 널리 쓰이던 때, 그러니까 1950년대 후반에서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보다 오늘에 이르러 더욱 쓸모가 크며, 개입의 시대에서 급진적 실천의 역사적 논리와 모순을 탐색하는 데 그 개념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pg.196
1972년 네크트와 클루게가 사회주의적 문화혁명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문화혁명도 있다고 지적했을 때, 그들은 자본주의적 문화혁명이란 정확히 문화 생산과 소비와 정서적, 지적 생활을 부르주아지가 구조적으로 재정렬함으로써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에 문화혁명이란 관념이 전후 성장과 번영의 시대의 끝자락에서 등장했다면, 그 이후의 해들은 장기적인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노선에 따른 서구 경제의 끊임없는 재구조화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혁명의 구조적, 자본주의적 버전--예컨대 금융화되고 기업화된 대학, 대중 관객과 후원 섭외 요구에 정책을 지배받는 예술 공간 등--에 너무나 친숙하다.
(..) 당장 제기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만약 예술 노동이 얼마간 오늘날의 '문화화된' 노동의 모델이라고 한다면, 대체 뭐가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예술 활동의 잠재태일까. 또 구조 혁명은 명시적 혁명을 완전히 집어삼킨 것일까.
pg.207
[미국의 민주주의와 미합중국의 탄생] 이는 곧 정치적으로 파악할 때 존재에 대한 자각과 총체적 이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비극'이 쇠퇴함을 의미한다. (...) 그 어떤 정치 제도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의 기능 장애, 속죄를 위해 희생된 자의 통탄에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기 위해(디오니스소스 연극에서 잠깐이나마) 민주주의의 굴레 밖에 스스로를 위치하려는 노력도 역시 좌천된다.
희생 제의는 이제 없다. 그렇다고 정치가 남은 것도 아니다.
신도 더는 없다. 그렇다고 인간의 도시가 생겨난 것도 아니다.
(...) 남은 것은 이 상실감의 장엄함을 축하하는 텅 빈 제의뿐이다.
-로메오 카스텔루치 "<미국의 민주주의>에 관해" (2017)
pg.209
그러나 감옥 같은 사회가 보장하는 오늘날의 숨 조이는 가치들을 앞에 두고, 감옥의 문턱에서 사는 오늘날, 무관심은 금물이다.
어떤 개가가 주어지든, 우리는 가담하고 싶지 않다. 침묵하고 싶지 않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냥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사람을 닮아가는 일은 불쾌하다.
-기 드보르, "허무주의의 안일함을 종식시키며" (1954)
pg.211
이미 존재하는 예술적 요소들을 새로운 조합으로 재활용하는 '전용'(détournement)은 SI 조직 이전과 이후 동시대 아방가르드의 지속적인 경향으로 이어져 왔다. 전용의 두 가지 원칙은, 전용된 자율적 요소의 중요성이 원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할 정도로 제거된다는 것, 동시에 각 요소에 새로운 관점과 효과를 부여하는 의미 있는 조합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전용은 "모든 사회적, 뻐적 관습에 대한 직접적인 박치기"다.
(...) 아스거 요른은 "전용 회화"(1959)라는 글에서 "전용은 '가치 절하'의 방식으로 가능해지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과거 문화 요소들은 '재발명'되거나 사라져야 한다. 전용은 무엇보다도 이전 표현 구성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pg.212
세계의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오늘날의 모든 표현은 더 이상 현실에 밀착해 있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패러디로 축소되어 있다. (...) "우리는 전용된 요소들의 축적이 원래의 맥락을 언급함으로써 분개나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목적에 그치지 않고, 의미도 없고 기억도 되지 않는 원형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표출하고 어떤 숭고한 것을 만드는 것에 관련되는, 패러디스럽게 진지한 단계를 상상해야만 한다."
패러디와 진지함의 이러한 조합은 전적으로 혁신적인 집단행동을 절박하게 촉발, 진척시킬 필요성과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직면해야 하는 시대, 가장 진지한 모험이 예술과 그에 대한 불가피한 부정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으로 은폐되고 발견을 위한 근본적인 여정이 놀라울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는 이 시대의 모순을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