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Susanne Kennedy <Angela>

Time Fold 2024. 8. 17. 22:53

2023.07.01, Theater der Welt 2023

해체된 폐허 이후에 의미를 말하지만. 오히려 더 큰 공허를 남기는 작품이다.
뭘 본 걸까, 돌이켜 생각하면 결국은 아무 것도 없는 껍데기밖에 생각이 안난다.
주인공인 안젤라는 일상을 공유하는 브이로그 유튜버다. 작품에는 안젤라, 어머니와 친구 2명,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신화적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모두 어딘가 감정이 거세된 것 같은 NPC의 느낌이다. 이들은 같이 햄버거를 먹기도 하고, 유튜브를 찍기도 하는 등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가 안젤라가 갑자기 굉장히 아프기 시작하고, 실종되었다가, 입에서 작은 아기를 토해낸다. 그리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작가는 이 작품을 자기가 최근 들어 느끼게 된 벗어날 수 없는 몸의 열기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고열, 감기, 팬데믹, 지구온난화 등의 비유로서 뜨거운 몸의 감각에 주목한 것이다. 이어서 수잔네 케네디는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를 말한다. 모든 것이 해체된 잔해 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케네디는 스스로를 "메타모더니스트"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케네디의 작품에서는 그가 추구하는 "의미"가 너무도 표피적이고 가벼워서 (이를테면, "모든 답은 네 안에 있다") 해체주의의 폐허에 굳건한 나무를 심기는 커녕, 그조차도 잔해의 한 조각이 되어 날아가버린다. 모든 배우들이 더빙으로 말을 한다거나 영상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활용하는 특유의 형식 때문인지 작품을 보는 내내 심리적으로 무대와 유리되는 경험을 했다. 작품을 보고 나서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 "의미"를 대신할만한 어떤 물리적인 신체적 감각이나 정동이 발생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열감은 무기질적인 무대 위에서 차게 식는다. 스마트폰 스크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주 오랜 시간 멍때리고 바라본 기분이다. 그 어떤 것도 나의 피부로 와 닿지 않는 픽셀들의 나열을 보다보면 인지적인 공백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의 공간은 사색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대신, 귀여운 동물이 뛰어다니거나, 슬라임을 휘젓거나, 누군가의 블랙박스 영상이 송출되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무"의 공간에 더 가깝다. 그 와중에 만듬새와 때깔은 몹시 좋아서,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홍대 힙스터들의 허세스러운 랩배틀 속 아무말 대잔치와도 닮아 있다. 아무런 무게를 갖지 않는 콘텐츠를 한가득 보다가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을 때의 허무함.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의 기분은 그것과 가장 흡사했다. 어떤 면에서는 21세기 틱톡의 정서를 가장 잘 구현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작품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 정서를 구현하는 데에 그치고, 그를 넘어설 수 있는 비판적인 시각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의 정서를 단순하게 재현하고, 삶의 의미를 납작하게 동결시키고,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무비판적으로 전시하는 가운데 작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의 양상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체제순응적이고 문제적인 작품으로 거듭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어딘가 실험적인 냄새를 풍기고, 포스트드라마연극의 기법들을 쓰며 마치 전통적인 재현 연극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무대 위의 모든 요소(영상, 조명, 배우, 음성, 연기, 소품)가 그 어떤 정극보다도 재현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기만적이다. 리미니 프로토콜을 비롯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주역들을 이끌었던 동력은 환영으로부터 벗어난, 평평한 미학을 통해 오히려 더 뜨거운 삶의 이슈들을 직시하려는 비판의식이었다. 이들이 재현을 거부했던 이유는 작품에서 가장 치열한 고민이 펼쳐지는 장이 관객의 머리속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케네디는 그 껍데기를 차용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요소를 다시 재현에 복무시키고, 비판적인 관점으로 채워야 할 그 안을 텅빈 채로 놔두거나 포츈 쿠키 속 쪽지처럼 얄팍한 메시지를 담는 용도로 쓴다. 과거의 정극이 감정을 사로잡는 연기나 스펙터클한 무대장치로 관객을 환영 속으로 현혹했다면, 케네디는 인스타그램 릴스와 똑같은 전략으로 우리의 주의력과 시간을 사로잡는다. 가장 반동적인 연극이 새 것의 탈을 쓴채 진보를 말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사람들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적당히 지적인 작품이라고 추정되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을 안기지 않지만, (허세스러운 미학 때문에) 어딘가 매우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은,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MZ세대의 감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함께 하다보면 조금은 신세대가 된 것 같은 이 연극을 보고 나서, 진보에 동참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극장을 나선다. 

비판적 구조주의가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로 이어질 위험을 갖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 이후로 나아가야 한다는 지점에 관해서는 크게 동의하지만, 그 다음이 무조건적인 순응주의나,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지는 것은 문제다. 비판을 거세한 채 납작한 의미만을 좇는 케네디의 작품은 이 세상의 복잡한 결을 다각적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 반동적인 동일성의 논리, 획일적인 본질과 의미는 사람들을 하나의 논리 아래로  복속시킨다. 해체주의의 폐허를 딛고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운 질문이자 비판적인 도약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질문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문이 발밑을 끊임없이 허물었던 해체의 세기에서 더 나아가, 지금 이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직시하고 그 불가능성을 넘어서는 일, 우리가 아직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를 태동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