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rentina Holzinger <Sancta>
24.06.11. Wiener Festwochen
영상에서는 클리셰로 가득하고 자극성만을 추구하는 정체성 정치의 끝판왕처럼 느껴졌었는데, 실제 공연을 보니 왜 사람들이 홀칭어를 두고 신흥 종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매드맥스에서 녹색의 땅으로 향하는 퓨리오사와 탈출한 씨받이 여자들의 무리와 비슷한 느낌.
작품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힌데미트의 오페라 <상타>의 음악과 줄거리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형식적 구조는 천주교 미사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이다. 시작, 말씀 전례, 고해성사, 성찬 전례, 마침 예식 등. (관객과의 대화에서 홀칭어 왈: "끔찍한 고통, 희생, 고문으로 점철된 천주교 미사에는 트리거워닝이 없는데 우리 작품의 트리거워닝은 점점 더 길어진다.") 공연 중 성경의 요소 요소가 재현된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예수의 희생과 그 육신과 피를 마신다는 것, 가시월계관을 쓴 예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원죄를 벌하고 참회하고, 초월을 갈구하는 것. 하지만 우리가 종교라는 미명 하에 허용하는 이와 같은 폭력적인 상징들이 모두 서구 남성 중심의 기독교적 시스템 하에서 가장 억압받아 왔던 몸들 (장애, 트랜스, 퀴어 등)에 의해 유쾌하게 전유되거나, 반대로 날 것 그대로 재현됨으로써 그 폭력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서 인간의 살갗을 찢어 살점을 발라내 구워먹는달지, 날갯죽지에 고리를 걸어 날개를 달아 천사들이 날아다닌달지. 작품의 가장 첫 장면, 두 여성이 십자가에 매달려 섹스를 펼칠 때부터, 말그대로 기독교의 폭력을 전유해 해방적 힘으로 전환해내는 "불경한 것들" 천지다.
“The violence affects defenseless bodies, as evidenced by the voices of countless victims of abuse that are too often drowned out. Violence is hammered in, internalized and pathologized, it is inflicted on those who are perceived as deviant, who form (female*) subjectivity beyond Christian doctrine; delegitimization of sex as pleasure or work, the open stigmatization of queer people or the unattainable phantasm of purity. ” (작품 소개글)
작품은 천주교의 교리는 결국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것에 주목하며, 그 사랑을 성적 쾌락의 발산과 등치시킨다. 금기시되고, 병리화되고, 음성화되고, 상품화되었던 섹스가 자유롭게 분출될 때, 분열과 증오와 나눔을 넘어설 수 있는 전복적인 힘을 갖는다고 말한다. 작품에는 작가 본인을 포함해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명의 벌거벗은 여자, 혹은 트랜스의 몸밖에 안 나오는데, 어느덧 그게 외설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이 찾아와, 나체에 대한 강력한 금기가 어떻게 아직까지도 (그 많은 60년대의 해방 운동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작동하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여성의 나체는 더럽지도, 외설적이지도, 부끄럽지도 않으며, 자유롭고 해방적이라는 당연하고 이미 너무 익숙하지만 여전히 현실로부터는 유리된 주장을 올곧이 감각하게 한다. 서구 백인에 의한 남성기독교중심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전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적이고 통쾌하다. 거부의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여성 모계사회의 평평한 울타리 안에서, 경계없는 성적 쾌락과, 돌봄과 사랑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상상마저 생겨난다. 작품은 틀림없이 엄청난 시각적 스펙터클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퀴어한 몸들을 동원하거나 전시하는 대신에, 실제로 그들이 숨쉬고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천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청나게 진부하고 낯간지럽게 들리지만, 무대에서 정말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 있는 신뢰와 애정이 느껴져서, 오늘날 퀴어 몸을 아우르는 작품을 만든다면, 이렇게 끝까지 가야 하는구나, 이렇게 모순 없는 실천에 도달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공동체를 만드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구나라고 마지못해 설득되게 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고통도, 자해도, 자학도, 비명도 모두 어딘가 따뜻하고 안전하고 목가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과, 서로에 대한 신뢰, 고통을 함께 보듬는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작가 본인이 그 과정에 언제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방적인 남성적 관음적 응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다양성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결국은 좋은 예술이란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보여주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