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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유희 개념과 포스트댄스 담론 본문
벤야민의 유희 개념과 포스트댄스 담론
- 들어가며
본 소논문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유희Spielen 개념이 오늘날 ‘포스트댄스’로 불리는 무용 담론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음에 주목한다. 벤야민에게 있어 유희공간Spielraum은 자연과 인류의 상호작용을 예행할 수 있는 실험적 반복의 장이자 혁명이 태동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이었다. 당시 벤야민은 이러한 유희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매체가 영화라고 보았다. 그러나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이 잠식한 오늘날의 영화 산업에서 실험과 변혁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러한 유희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적극적인 시도는 현재 무용계에서 진행 중인 포스트댄스 논의에서 포착된다. 포스트댄스 담론은 20세기 말 ‘신체’에서 ‘개념’으로 이동한 동시대 무용이 오히려 고도 산업자본주의의 논리를 답습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며 대안적 무용을 상상하고자 하는 일련의 사유를 아우른다. 본 연구에서는 벤야민의 유희 개념 중 아이의 놀이와 관련된 측면을 중점적으로 살피고 그것이 어떻게 ‘포스트댄스’ 담론에 적용될 수 있는지 분석한다. 이로써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하는 동시에 영원히 참신하길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 속에서 벤야민이 말한 ‘유희 공간’으로서 무용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성을 살펴본다.
2. 포스트댄스 담론
2.1 포스트댄스 담론의 등장
포스트댄스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무용계에 떠오른 계기는 2015년 10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포스트댄스 콘퍼런스”다. 예술가, 이론가, 비평가 등이 모인 이 3일간의 행사는 포스트댄스라는 용어를 정의하거나 새로운 무용 사조를 정립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콘퍼런스 소개에 나와 있듯 말 그대로 “1960년대 이래 ‘춤’에서 벗어난 무용이 걸어온 궤적을 성찰하고 앞으로 무용의 역할을 상상하는 자리였다.” 콘퍼런스는 ‘코레오그래피와 포르노그래피,’ ‘댄서의 노동,’ ‘창의 자본주의하에서 무용은 어떻게/어디서/언제 실현되어야 하는가’ ‘참여의 미래, 혹은 해방된 관객에서 행동가로’ 등 다각적인 주제에 관한 발표와 토론으로 구성되었고 그로부터 파생된 사유들은 『포스트댄스』라는 출판물로 발간되었다. 이 자리에서 제기된 논의는 오늘날 무용이 안고 있는 문제를 비교적 날카롭게 지적하는 동시에 다양한 각도에서 대안을 제안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또한 무엇을 무용으로 규정할 것인가라는 지난한 존재론적 논의를 뒤로하고 무용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이끌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했을 때, 포스트댄스는 명확하게 정의된 예술 사조라기보다는 오늘의 “댄스” 즉 춤과 관련된 여러 질문과 상상이 혼재하는 담론의 장으로 보는 편이 더 유효할 것이다.
2.2 포스트댄스 담론의 문제의식
90년대 이래 무용의 지배적인 경향은 ‘열심히 움직이지 않는 신체’이다. 소위 농당스(non-danse)로 일컬어지는 이 현상은 어디까지를 무용으로 인식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초 모던 댄스는 서사의 아름다운 모방을 표방했던 고전 발레에 대한 저항으로 등장했으며, 이어진 포스트모던 댄스는 모던 댄스의 감정 표현 역시 모방이라고 지적하며 일상적이고 즉흥적인 움직임을 통해 무용을 탈신비화하고자 했다. 무용이 거쳐온 ‘전복’의 역사는 90년대 농당스에 이르러 극장이라는 재현 장치, 무용수의 몸, 신체 움직임, 리듬 등 무용을 구성한다고 여겨졌던 가장 본질적인 요소에 대한 의문과 함께 “춤과 음악과 무용수가 없는 작품에도 여전히 안무적이라고 할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급진적인 질문에 다다른다. 이후 움직임 그 자체보다 무용을 둘러싼 개인적, 제도적, 사회·정치·경제적 기제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농당스의 예술사적 가치와 그로부터 파생된 작품들의 중요성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에서는 그 이면의 경향을 살피고자 한다. 철학자 보야나 쿤스트Bojana Kunst는 ‘개념’ 중심의 무용 작업이 주체성과 창조성에 대한 강박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 체계에 포획될 위험성을 지적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많은 무용 공연은 주체성의 양가적 생산과 연결되었다. 이와 동시에 주체성은 정확히 예술가의 정서적, 창의적 능력의 물신화를 통해 평가절하되었다. 주체성은 유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치 있는 생각을 생산해내며, 중립적인 상태에서 늘 신선하게 현존하는 것으로, 그러나 동시에 불안정하고, 지치고, 고립되고, 외롭고, 주변부적인 것으로 전시되었다. [...] 이와 같은 새로운 무용 기술은 동시대 자본주의의 중추를 이루는 주체성의 생산과 그것의 반영으로서 확장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노동, 감정 노동과 평행하여 등장했다.”
무용을 노동의 관점으로 봤을 때, 쿤스트는 과거 신체의 격렬한 움직임과 기교로 구성되었던 무용에서 ‘개념 무용’으로 이동하면서 개인의 노동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말한다. 과거 대규모 ‘무용단’ 중심이었던 작품 제작이 점차 개인 예술가로 분화되고, 개인이 서로 창의력을 경쟁하며 지원금을 획득해야 하는 불안정한 노동 환경 속에서 무용가는 대중 앞에서 끊임없이 개인적인 삶과 기억을 드러내고, 작업 과정과 방법론을 공유하고, 창의적인 주체로서 존재감을 피력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이 분절되고 추상화되는 고도 자본주의 경제가 유연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는 것과 닮아있다. 또한 무용의 정의가 무한히 확장됨에 따라 예술가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새로운 무용’을 창조해나가야 한다는 진보의 강박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포스트댄스의 문제의식은 발레나 모던 댄스와 같은 움직임 중심의 재현적, 표현적 무용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로 포획되고, 환산되고 평가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춤의 능력에 변혁의 잠재성이 있다고 본다. ‘무가치하고 비생산적인’ 활동으로서의 춤은 벤야민이 어린아이의 놀이에서 발견했던 특징과 그로부터 상상했던 혁명의 단초를 상기시킨다.
3. 벤야민의 유희 개념과 포스트댄스
3.1 즉각적 창조성
벤야민의 유희 개념은 그의 여러 글에서 아이의 놀이, 청중 앞에서의 연기, 도박 등 다양한 의미로 등장한다. 본 연구에서는 그 중 『일방통행로』와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장 강령」, 「장난감과 놀이」, 「장난감의 문화적 역사」, 「오래된 장난감」에 등장하는 아이의 놀이라는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먼저 벤야민이 말하는 놀이의 특성은 장난감과의 비교를 통해 잘 드러난다. 「장난감과 놀이」에서 벤야민은 장난감이 어린이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믿는 것은 오류라고 말한다. 딸랑이는 고대로부터 한 사회 내에서 악령을 쫓기 위한 도구로 여겨졌고 그렇기 때문에 아기의 손에 쥐어졌다는 예가 보여주듯, 장난감은 어른 세대에 의해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지고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아이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벤야민에게 있어서 아이의 놀이는 종종 간주되는 것처럼 어른, 사회, 장난감과 같은 외부적 충동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놀이는 아이로부터 직접적으로 생성되며 아이가 그것을 놀이로 규정하는 순간 발생한다. 아이는 어른 세계의 작동 규칙, 법칙, 관습을 주입받지 않은 상태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에게, 자신들에게만 돌리고 있는 얼굴을 인식한다. [사물]들을 이용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 그냥 놀다가 만든 것을 통해 실로 다양한 종류의 소재 상호 간에 새로운, 비약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런 식으로 그들만의 사물 세계, 커다란 사물 세계 속의 작은 사물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아이의 놀이는 미리 규정된 것을 모방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즉각적으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점은 「장난감의 문화적 역사」에서도 강조된다. 아이는 장난감을 보고 그것에 어울리는 놀이를 상상한 뒤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아이는 “당기고 싶어서 말이 되고, 모래를 가지고 놀고 싶어서 제빵사가 되고, 숨고 싶어서 도둑이나 경찰이 된다.”
이처럼 정해진 용도를 수행하거나 특정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가 창조의 동기가 되는 아이의 놀이는 포스트댄스가 주목하는 ‘춤’의 잠재력과 닮아있다. ‘안무’의 본질을 고민하고 지평을 넓히려는 농당스의 흐름 속에서는 (기존의 무용 정의와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안무가의 개념적 실험이 춤 그 자체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무용 이론가 마르텐 스팽크베르그Mårten Spångberg는 안무란 본질적으로 체계적인 조직화 과정이며, 언어의 구축이라고 말한다. 언어로서의 안무는 ‘가능성의 영역realm of the possible’, 즉 우리의 의식적이고 언어적인 상상 범위 내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의 영역에 머무른다. 반면, 발생하는 그 순간의, 날것의 춤은 조직화되지 않은 그 무엇이다. 안무가 재료를 필요로 하는 구조화 도구라면, 춤은 그러한 구조를 필요로 하는 원재료이다. 태동하는 순간의, 조직되지 않은, 시공간으로 확장되지 않은 춤은 역사도, 미래도, 정체성도, 위계도 없는 ‘현존’으로만 존재하며, 그것으로부터 무엇이 가능해질지 알 수 없기에 가능성의 영역을 초월한 ‘잠재성의 영역realm of the potentiality’에 위치한다.
의식과 지각으로 매개되지 않은 채 즉각적 충동에 의해 이뤄지는 아이의 놀이 행동과 마찬가지로 춤은 지각과 행동 사이에 단절이 없는 잠재적 창조력이라는 차원에서 벤야민이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장 강령」에서 말한 “진정한 혁명성”을 지닌다. 스팽크베르크는 춤이 안무의 교화에서 벗어나 ‘춤’ 그 자체로 존재할 때, 현실의 가치체계로는 포획되지 않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킬 힘을 획득한다고 본다. 이는 춤이 안무화되어 작품으로 무대에서 올려져야 비로소 예술로 성립한다는 통념을 거부하는 일련의 시도들로 이어진다. ‘함께 모여 춤추기,’ ‘춤 경험을 생성하기 위한 워크숍,’ ‘즉각적인 정동 경험을 촉발하는 춤’ 등이 그 예이다.
3.2 무용(無用)한 반복
벤야민의 놀이 개념에서 ‘대원칙’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또 다른 측면은 반복이다. 「장난감과 놀이」에서 벤야민은 아이에게 “다시!”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없다고 말하며 그것이 성애만큼이나 강력한 충동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반복을 죽음의 충동으로 봤던 프로이트와는 달리 벤야민은 “차이로서의 반복이라는 유토피아적 개념의 측면에서 유희를 재배치시킨다.” 미리암 한센Miriam Hansen에 따르면 벤야민의 역사철학에서 반복 개념은 두 극단 즉, 불변의 영속화로서 패션이라는 측면과 과거 행복에 대한 분투라는 측면을 지닌다. 본 연구는 후자에 주목하여 반복은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이번에는 될지도 몰라)”의 논리가 가능한, 마르지 않는 실험의 저장소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한센이 유희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량 생산, 소비의 대상이 됨에 따라 그 잠재력이 잉여가치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듯, 반복이 지니는 실험적 잠재력 역시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공장식 반복 노동에, 그리고 오늘날에는 계속해서 새로울 것을 요구하는 참신성의 굴레에 포획될 위험을 지닌다. 「미메시스적 능력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은 아이의 끊임없는 창의적 흉내내기라는 예를 들며 미메시스적 능력을 반복과 연결하여 비감각적 유사성을 생성해내는 원초적인 능력으로 설명한다. 이와 같은 미메시스적 반복 하에서 모으기, 해체하기, 파괴하기, 재조립하기의 등의 반복으로 발견되곤 하는 어린아이의 놀이 활동은 계속해서 똑같은 반복인 동시에 매번 미세하게 다른 것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창의적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창의성은 무에서 유를 생산해내는 천재성, 자율성이라는 의미와는 크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도 자본주의에서 창의적 반복이라는 개념은 매번 조금 더 참신하고 독특한 것을 만들어낼 것을 요구하는 상품의 판타스마고리아로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미메시스적 능력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이 인간의 원초적 미메시스 능력 중 하나로 꼽았던 춤 역시도 오늘날에는 비감각적 유사성을 만들어내고 창의적 실험의 장을 열어주는 기제가 되기보다는 극장과 미술관을 위해 반복적으로 ‘참신한 작품’을 제공해야 하는 ‘창조적’ 생산력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 저항하기 위해 포스트댄스 담론에서 거론되는 많은 작품은 소위 ‘무용(無用)한 반복’, 즉 아무런 경제적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며 일견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들의 반복을 시도한다. 반복과 변주를 통해 아름다움의 이상에 근접하고자 했던 과거의 표현적 반복도 아니고, 끊임없이 생산되고 판매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한 참신성의 반복도 아닌 무용(無用)한 반복은 벤야민적 관점에서 봤을 때 두 가지 변화의 잠재력을 지닌다. 첫째, 경제적 가치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 그 순간의 즐거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만들어내지 않는 순수한 유희적 반복을 구현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유희가 “착취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노동”과 등치 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반복을 통해 생성된 공백의 공간을 “아직은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다양한 감각 경험을 실험할 수 있는 유희 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변화의 기제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두 가지 무용 작품 사례를 살펴보겠다.
포르투갈의 안무가 모니카 카예Mónica Calle의 <지도 제작 시도Attempt for Cartography>에서는 12명의 일반인 퍼포머가 무대에 등장하여 약 2시간 동안 알몸으로 세 가지 동작을 차례로 시도한다. 다 같이 라벨의 ‘볼레로’에 맞춰 발을 구르며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춰 발레 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서서 최대한 오랫동안 버티는 동작, 그리고 연주하는 법을 모르는 악기(바이올린, 첼로, 비올라)로 베토벤 협주곡을 연주하는 동작이다. 각각의 시도는 도전-실수-실패-재도전의 지난한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처음부터 목적도, 목표도 알 수 없는 세 가지 동작을 차례로 땀을 뻘뻘 흘리며 반복한 그 결과물은 결국 처음과 크게 다를 바 없고, ‘성취’나 ‘진보’라고 일컬어질 만한 결실을 도출해내지도 않는다. 카예는 이 작품이 “저항적인 아름다움과 불완전성이 갖는 힘을 통해 통제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어떤 완성도나 결실을 추구하지 않고 그저 순간의 반복에 몰두하는 날것의 신체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가치 체계 속에서 신체의 움직임을 규정하는 진보와 생산성의 논리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그 자체로 해방적인 힘을 지닌다. 이는 실패에 개의치 않는,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상상 불가능한 것을 태동시키고자 하는 벤야민의 실험 저장소와 맞닿아 있다. 또한 앞서 말한 세 동작의 끝없는 반복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매우 힘들지만, 퍼포머들이 표출하는 땀, 표정, 동작의 에너지 등은 이들이 그 동작으로부터 매 순간 희열을 느끼고 있음을 시사한다. 푸리에가 말하는 “열정적인 노동(impassioned work)”, 유희 기반의 노동을 이상적이고 해방적인 행위로 보았던 벤야민처럼, 유희적 반복을 통해 고무된 신체의 격렬한 움직임은 착취로 소급되지 않는 대안적인 노동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마르텐 스팽크베르크의 <기후(The Climate)>(2019)는 네 명의 댄서가 등장하는 무용 작품이다. 이 작품은 완성된 공연을 즐기는 것보다는, 댄서들의 연습실에 녹아드는 행위에 더 가깝다. 공연에는 명확한 기승전결이 없으며 몇 개의 단순하고 물 흐르는 듯한 동작 시퀀스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엇보다 댄서들은 시종일관 동작을 멈추고 바닥에 둘러앉아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나 최근에 방문한 맛집 등 일상에 관한 수다를 떤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일어나 다시금 동작을 가볍고 태연하게 되풀이하며 연습한다. 90분의 공연 시간 내내 댄서들은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거나, 기교를 뽐내거나,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과시하는 대신 반복되는 동작 하나하나를 혼자, 또 함께 즐기고 음미한다. ‘무대화된 공연’이라는 목표 지점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완전성’의 준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행위는 유희적이다. 스팽크베르크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자연 풍경’에 빗대는데, 이 작품에서 역시 댄서들은 숲에서 흔들리는 나무처럼 관객에게 무심하고 유유하다. 이에 따라 관객 역시도 일방적으로 의미를 전달받는 객체가 되는 대신 때로는 잠에도 들었다가 옆의 다른 관객과 이야기도 나누며 자유롭고 해방된 위치에서 춤 그 자체를 만끽할 수 있게 된다.
벤야민은 자연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인위적 노동’은 필연적으로 인간 노동력의 착취로 강화될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착취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자연과의 관계가 형성될 때 인간의 노동 역시 착취에서 벗어나 ‘진정한 노동’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아이가 자연과 맺는 미메시스적 관계, 즉 “가치의 증식 대신 자연의 개선”을 추구하는 유희야말로 노동의 새로운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팽크베르크 역시 이 작품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고하기 위한 단초로 유희를 선택한다. 제목이 시사하듯, <기후>는 환경과 자연에 대한 작품이다. 스팽크베르크는 오늘날 기후 변화를 대면할 때 가장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중심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세계관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과 문화, 노동과 유희,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이 작품에서 그간의 무용 환경이 상정했던 다양한 목표점과 경계들은 사라진다. 춤 연습은 공연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순수한 유희 활동이 되며, 무용 작품은 완성되어야 하는 생산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풍경의 일부가 되고, 관객과 무대의 경계는 무화된다. 벤야민의 사유와 스팽크베르크의 작품은 유희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고하고 자본주의적 가치체계에 대한 대안을 고민한다.
4. 나가며
벤야민에게 유희 공간은 행동을 매개 없이 바로 실행할 수 있으며 상상 불가능했던 것을 실험할 수 있는 혁명적인 공간이다. 그는 당시 가장 새로운 예술 언어였던 영화에서 그러한 공간의 가능성을 찾았다. 영화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열어주게 될 유희의 공간은 기술의 실패한 적용이 야기한 병리학적 효과를 집단적인 차원에서 무효화할 수 있는, 인간이 “다시 우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새로운 지각 경험을 선사하고 마비된 감각중추에 대한 치료적 효과를 지닐 수 있다는 주장은, 한센이 지적하듯, “디지털 기술의 출현과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통합과 함께, 영화, 예술, 정치에 대한 그의 예견이 틀린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부정적인 주장”을 맞닥뜨렸다. 본 연구에서는 벤야민이 영화에서 찾았던 유희 공간의 가능성을 최근 대두되고 있는 ‘포스트댄스’ 담론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자본주의 논리에 포섭된 무용으로부터 이탈하여 대안을 찾기 위한 다각적 시도 속에서 오히려 벤야민이 상상했던 즉각적인 행동과 실천의 공간, 또는 상상 불가능한 것을 무한히 실험할 수 있는 저장고의 면모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먼저 이성과 가능성의 영역인 안무로 조직화되기 이전에, 날것의 잠재성으로 존재하는 ‘춤’이 벤야민이 말한 유희의 ‘잠재적 창조력’을 지닐 수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모니카 카예와 마르텐 스팽크베르크의 두 무용작품을 통해 일견 의미 없어 보이는 동작들을 반복함으로써 목적성과 가치 생산 종용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저항하고, 착취로 소급되지 않는 순수한 유희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타 예술 장르와 달리 춤이 가능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잠재성을 지니는 이유는 무엇인가, ‘포스트댄스’라는 담론의 명칭은 과연 타당한가, 포스트댄스에서 강조하는 즉각적인 정동과 미적 경험이 심미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가, ‘무목적성’을 만들어내려는 안무가의 ‘목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 남는다. 이에 대서는 향후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 문헌]
1. Josefine Wikström, “Notes on Post-dance”, Post-Dance, MDT, 2017.
2. 심하경, “무용의 자기반영적 비판으로서 농당스(non-danse)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6.
3. André Lepecki, Exhausting Dance, Routledge, 2006.
4. Bojana Kunst, “Some Thoughts on the Labour of a Dancer”, Post-Dance, MDT, 2017.
5.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ume 2, Part 1 1927-1930, ed. Michael W. Jennings, Howard Eiland, and Gary Smith, Translated by Rodney Livingstone and Other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6. Michael Powers, “The Smallest Remainder: Benjamin and Freud on Play”, MLN, Volume 133, Number 3,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8.
7. 발터 벤야민, “건설 현장”, 『일방통행로』, 옮긴이 조형준, 새물결 출판사, 2007.
8. Mårten Spångberg, “Post-dance, An Advocacy”, Post-Dance, MDT, 2017.
9. Miriam Hansen, “Play-form of Second Nature”, Cinema and Experience: Siegfried Kracauer, Walter Benjamin, and Theodor W. Adorno,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2.
10.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ume 2, Part 2 1931-1934, ed. Michael W. Jennings, Howard Eiland, and Gary Smith, Translated by Rodney Livingstone and Other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11. Marina Montanelli, “Walter Benjamin and the Principle of Repetition”, Aisthesis 11(2), Firenze University Press, 2018.
12. Mónica Calle, 2019년 비엔나축제주간 프로그램북
13. Walter Benjamin, The Arcade Project, Translated By Howard Eiland and Kevin McLaughlin, Harvard University Press.
14. Walter Benjamin, One-Way Street, Translated by Edmund Jephcott, Kingsley Shorter, NLB,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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