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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동에서 상실을 애도하기 본문
텅 빈 공동에서 상실을 애도하기 (Mourning the Loss from Emptiness)
- 들어가며
페미니스트 공연 이론가 페기 펠란(Peggy Phelan)은 『섹스를 애도하기(Mourning Sex)』에서 어쩌면 연극과 퍼포먼스는 상실을 연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녀에 의하면 인간은 자궁에서 분리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겪게 되는 매 순간의 상실을 애도할 수 있도록 태어난다. 그리고 공연은 그러한 상실을 직시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공연에서 모든 가시적인 것은 사라짐을 전제로 현현한다. 극장은 실시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사라짐을 경험하고 그에 대한 애도를 체현하는 공간이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상실을 체현하고 애도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로부터 어떤 가능성을 모색하는 한 작품을 살펴본다. 2017년 벨기에 쿤스텐페스티벌(Kunstenfestivaldesarts)에서 공연된 마르텐 스팽크베르크(Mårten Spångberg)의 <게르하르트 리히터, 극장을 위한 작품(Gerhard Richter, une pièce pour le thêatre)>는 열 명의 댄서가 등장하여 다양한 층위에서 상실을 체현하는 무용 공연이다. 약 세 시간에 달하는 공연시간 동안 짧은 단위의 춤과 대사가 반복되며 모든 인과와 의미를 무화시키고, 상실을 하나의 ‘감각’으로 연금한다. 그렇게 연금된 상실의 감각은 텅 빈 공동(emptiness)을 만들어내는데, 그 무(無)의 공간은 상실을 애도하는 장소인 동시에 새로운 잠재성이 배태될 수 있는 곳이다. 전혀 예측불가능한 무언가가 우발적으로 탄생할 수 있는 이 잠재성의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모든 것이 인과적으로 결정되고 가치체계로 포획되는 오늘날, 공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대안적 역학을 제안한다.
2. 게르하르트 리히터, 극장을 위한 작품
무대에는 열 명의 댄서가 등장한다. 과거에 세들라베 무용단, 로사스, 트루블린, 니드 컴퍼니, 아크람 칸 컴퍼니 등에서 활동하며 한때 세계 정상에 섰던 댄서들이다. 모두 40세를 넘어 신체적 기량의 최고점을 지난 이 시점에, 그들은 다시 무대에 올라 춤을 춘다. 무대는 북유럽풍 인테리어로 꾸며진 어느 가정집의 거실이나 라운지 같다. 바닥은 얼룩소 가죽 카펫으로 덮여 있고, 유리 협탁과 촛대, 커피컵 등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무려 세 시간에 달하는 이 공연은 많은 것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운지 음악이 배경에서 흘러나온다. 그 어떤 긴장의 고조도, 정서의 전달도 시도하지 않는 음악은 공연 내내 되풀이되며 희미하게 존재한다. 댄서들은 하와이언 셔츠나 아디다스 트레이닝 팬츠, 파자마나 반바지 등 무늬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데, 무대에서 퇴장했다가 다시 등장할 때마다 다른 옷으로 바꿔 입고 나온다. 그 어지러운 패턴의 교체 속에서 각각의 댄서를 한 개인으로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들이 추는 춤은 트리샤 브라운, 이본느 라이너, 스티브 팩스턴,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 등 거장들의 안무에서 본 것 같은 어딘가 낯익은 동작 시퀀스들이다. 댄서들은 이 동작을 때로는 듀엣이나 트리오로, 때로는 모두가 저마다 다른 리듬과 속도로 춘다. 결코 즉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느 일관된, 논리적인 구성을 지닌 것도 아닌 이 동작들의 무작위적인 조합과 무한 반복을 통해 춤은 끝없이 흘러가는 형식으로 남을 뿐 그 어떤 의미도 인과도 전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춤 동작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댄서들은 번갈아가며 바닥에 앉아 상실의 경험을 다루는 짧은 텍스트들은 이야기 한다. 모두 괴로움, 상실, 노화, 죽음에 관한 영화 대사들이다. 어느 날 거울을 보고 나이든 자신의 얼굴에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발견한 순간이나, 오디션에서 간절히 원했던 배역을 따지 못했을 때의 좌절, 아들의 죽음 후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감 등이 그것이다. 멜랑콜리하고 감상적일 수도 있는 이 짧은 대사들을 댄서들은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발화한다. 댄서들은 분명 관객을 향해서 앉아 있지만, 그 발화는 대상을 결여한 채 허공을 맴돈다. 공연 초반에는 이 상실을 발화하는 주체, 즉 나이가 들어가며 필연적으로 추락과 상실을 마주하게 되는 댄서의 운명에 잠시나마 이입하게 되지만 그 대사들은 한 댄서의 입에서 다른 댄서의 입으로 옮겨 다니며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다. 이로써 그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고 상실의 멜랑콜리에 이입하려는 시도는 무색해진다.
춤, 의상, 대사는 모두 그 자체로는 고유한 특질을 지니고 있지만 중첩되고 반복되며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내린다. 감정도 표현도 없이 조용히, 끊임없이 움직이는 숲과 같다. 등장인물과 친숙해지고 그들에게 이입하고 친구가 되어야 하는 연극에 진절머리를 내며 대신 풍경을 선호했다는 거투르드 스타인을 언급하면서, 스팽크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풍경은 그 자리에 수동적으로 있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면 풍경은 당신을 둘러싸고 살아난다. 풍경과는 친해질 필요도 없고, 풍경은 당신을 어디론가 인도하지도 않는다. 풍경은 당신에게 무관심하다.” 그리고 그 풍경은 상실을 직접 체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무심하게 관조한다. 이 공연에서 상실은 발화되는 대사의 내용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과 목적이 배제된 형식의 반복을 통해 생겨난다.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몸들은 어떤 지향성이나 목적을 상실하고 있어서 매 순간 소환되었다 사라지는 육체성의 헛헛함을 실시간으로 드러낸다. 의상을 끝없이 바꿔 입는 댄서들은 개인적인 특질을 지운 채 계절마다 색을 바꿔 입는 나무처럼 수동적으로 흔들리며 조금씩, 천천히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상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나직한 대사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어떤 공허의 정동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어느 누군가가 경험한 특정한 상실에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매 순간 겪게 되는 본원적이고 필연적인 상실을 감각하는 것에 더 가깝다. 공연을 앞으로 추동하는 그 어떤 인과적인 서사도 없는 이 작품에서는 매 순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며, 발생했다 사라지는 것을 되풀이한다. 그 과정을 직시하다 보면 상실은 점점 더 구체적인 감각으로 치환된다. 어느 순간 상실은 텅 빈 공동(空洞)으로 체현되어 비눗방울처럼 퍼져나가 관객을 건드린다. 펠란의 말처럼, 무언가가 사라진 뒤 남은, 속이 텅 빈 윤곽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점점 더 시공간을 잠식해나간다. 나는 상실의 감각이 눈앞에서 물끄러미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무대 위 동작은 점점 더 느려지고, 댄서들의 발화는 점점 더 긴 침묵으로 대체된다. 마치 투명한 진공 상태의 공동이 보일 듯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순간, 댄서 중 한명이 일어나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그 비눗방울을 터뜨리며 공연의 끝을 알린다. 갑자기 찬물을 맞은 듯 번쩍 의식이 깨이는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 상실의 진공 속에 들어앉아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스팽크베르크는 사라지는 매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견뎌야만 비로소 응고될 수 있는 상실의 감각을 연금해낸다. 그것은 공간에 만들어진 거대한, 텅 빈 공동 속에 감각으로 맺힌다. 텅 빈,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시금 확장되는 시공간은 어느덧 상실을 애도하는 장이 된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상실을 애도하는 방법은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에 침잠하는 대신, 그 빈 공백으로부터 다시금 태동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약속하는 것이다.
“애도는 결코 죽은 자를 전용하거나 죽은 자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애도는 동반자가 되어 뚜렷한 무심함으로 [상실을] 함께 살아내는 것이다. 결코 지지해주지도, 도움을 주지도 않을 그 어둠 속에, 그 무심함 속에, ‘가능성(it was possible)’의 약속이 자리 잡고 있다.”
스팽크베르크는 이입하고 슬픔에 심취할 수 있는 애도의 공간을 만드는 대신, 인과와 의미가 사라진 공백, 상실의 감각이 응고된 공허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그렇게 생겨나는 텅 빈 공간은 가능성이 배태될 수 있는 공간이며. 이는 제목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암시하는 바이기도 하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테이트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니콜라스 세로타(Nicholas Serota)가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에게 추상회화를 그리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 그는 “글쎄요, 있잖아요. 그 순간에... 그 순간에는 그것이 가능했어요.”라고 답한다. 본인이 그렇게 무(無)에서 뭔가 새로운 것의 ‘가능성’이 탄생함으로써 추상회화를 시작했듯이, 리히터는 추상회화를 무(無)에 대한 묘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열어내는 표현방식이라고 보았다. 그 어떤 닫힌(closed) 주장이나 확실성도 없는, “개방성(openness)”만이 남은 그림인 것이다. 리히터는 바로 그러한 개방성 속에서 끝이 없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제어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잠재성, 즉 희망을 떠올릴 수 있는 인간의 내재된 능력을 찾고자 했다. 스팽크베르크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추상] 회화 작품들로 길을 열어준 것은 이성도, 지성도 아니다. 거기에는 원인과 결과도 없다. [추상회화는] 여러 이유로 가능해졌지만, 그 이유 중에 인과성을 지닌 것은 없다. 그 전날에도, 그 전주에도, 그 전달에도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마침 바로 그날, 그 순간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가능성은 오직 공동(emptiness)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아직 아닌 것(something not yet)의 감각으로부터 말이다.”
실제로 <게르하르트 리히터, 극장을 위한 작품>에서 발생하는 상실의 감각은 무언가를 잃었을 때 오는 슬픔이나 공허한 무기력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모종의 흥분감을 동반한다. 공허나 상실과도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실재하는 감각으로 체현되고 그것을 관객이 피부로 대면하면서 이성과 가시성의 영역 너머에 분명 어떤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분명 들끓는 힘을 가지고 있다. 텅 빈 공간 속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불가능했던 것을 불현듯 탄생시킴으로써 이 공연은 우발적이고 혁명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는 듯하다. 이는 춤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잠재성이기도 하다. 안무와 춤의 분리를 주장하는 글에서 스팽크베르크는 안무란 본질적으로 체계적인 조직화 과정이며, 언어의 구축이라고 말한다. 언어로서의 안무는 우리의 의식적이고 언어적인 상상 범위 내에서 가능한 것들의 영역에 머무른다. 반면, 텅 빈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찰나의, 날것의 춤은 조직화되지 않은 그 무엇이다. 태동하는 순간의, 조직되지 않은, 시공간으로 확장되지 않은 춤은 역사도, 미래도, 정체성도, 위계도 없는 ‘현존’으로만 존재하며, 그것으로부터 무엇이 가능해질지 알 수 없기에 ‘잠재성의 영역’에 위치한다.
한때 ‘안무’로 존재했던 유명한 안무가들의 춤은 이 공연에서 작은 조각들이 되어 구조도, 진정성도, 추진력도 상실한 채 무심히, 수동적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외연을 털어냄으로써 이 움직임들은 춤 본연에 가장 가까워진다. 본래 안무되었던 목적과 맥락은 사라지고, 무언가를 전달하고자하는 목적이나 의지가 없는 움직임 그 자체만이 남는다. 동작은 댄서들의 신체 위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주체성과 춤의 결속을 해체한다. 관객은 무대 위 댄서라는 고유한 주체를 보는 대신,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날것의 춤을 본다. 앞서 안무와 춤을 구분했던 동일한 글에서 스팽크베르크는 퍼포먼스와 춤의 가장 큰 차이를 바로 여기서 찾고 있다. 그는 퍼포먼스는 한 주체가 자신의 주체성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춤은 한 주체가 형식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춤을 추는 주체는 주체성을 생산해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해방되어 춤을 싣고 나르는 익명의 매개체가 되는데, 이때 비로소 춤은 주체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그 우발적 잠재성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이는 90년대에 ‘농당스’라고 불리며 등장한 무용 사조, 즉 움직임 그 자체보다 그를 둘러싼 개인적, 제도적, 사회·정치·경제적 기제를 드러내는 ‘개념’ 중심의 무용 작업들이 오히려 주체성과 창조성에 대한 강박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 체계에 포획될 위험성을 지닌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예술철학자 보야나 쿤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많은 무용 공연은 주체성의 양가적 생산과 연결되었다. 이와 동시에 주체성은 정확히 예술가의 정서적, 창의적 능력의 물신화를 통해 평가절하되었다. 주체성은 유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치 있는 생각을 생산해내며, 중립적인 상태에서 늘 신선하게 현존하는 것으로, 그러나 동시에 불안정하고, 지치고, 고립되고, 외롭고, 주변부적인 것으로 전시되었다. (...) 이와 같은 새로운 무용 기술은 동시대 자본주의의 중추를 이루는 주체성의 생산과 그것의 반영으로서 확장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노동, 감정 노동과 평행하여 등장했다.”
과거 대규모 ‘무용단’ 중심이었던 작품 제작이 점차 개인 예술가로 분화되고, 개인이 서로 창의력을 경쟁하며 지원금을 획득해야 하는 불안정한 노동 환경 속에서 무용가는 대중 앞에서 끊임없이 개인적인 삶과 기억을 드러내고, 작업 과정과 방법론을 공유하고, 창의적인 주체로서 존재감을 피력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이 분절되고 추상화되는 고도 자본주의 경제가 유연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는 것과 닮아있다. 또한 무용의 정의가 무한히 확장됨에 따라 예술가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새로운 무용’을 창조해나가야 한다는 진보의 강박 아래 놓인다. 이 공연에서 스팽크베르크가 채택하고 있는 많은 전략은 그러한 고도산업자본주의의 역학에 저항한다. 공연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인 반복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선보이고 정체성을 과시해야 하는 창의적 반복이 아니라 그러한 고유한 특질을 지워나가는, 상실의 반복이다. 생산과 진보라는 전진의 방향성과는 달리 이 공연의 모든 요소는 풍경처럼 그 자리에서 가만히 흔들린다. 깊이 개입하여 자신을 투여하는 것을 최선의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무심하게 관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머무른다. 주체성과 인과적인 결정론으로부터 해방된 춤은 날것의 형식으로 그 본연에 가까워진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무(無)의 공간은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로 포획되고, 환산되고 평가될 수 없는, 무언가가가 우발적으로 탄생할 수 있는 잠재성을 배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연에서 만들어지는 텅 빈 공간, 잠재성의 공간은 모두의 것이다. 이 공연에서 관객은 그러한 무(無)의 공간을 저마다 만들어내고 그것이 가진 잠재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상상하는 주체이다. 스팽크베르크는 앞서 발표한 <라 섭스탄스, 그러나 영어로(La Substance, but in English)나 <밤(Natten)>에서 4시간, 혹은 9시간처럼 긴 공연 시간을 고집하며 그 긴 시간 동안 자본주의적 표상들이 과잉으로 넘쳐나다 못해 결국은 무화되는 경험을 선사한 바 있다. 그러나 그 공연들은 모두 관객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게르하르트 리히터, 극장을 위한 작품>이라는 제목이 함의하듯, 이번 공연에서 그는 오히려 극장의 억압적인 기제를 활용한다. 세 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연 내내 관객석에는 불이 켜있다. 관객 역시 상실의 과정과 공백의 생성에 일부분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모든 소리의 데시벨이 최소한으로 유지되는 공연 내내 숨소리, 기침소리 하나 내기 어려운 무거운 침묵이 관객석을 짓누른다. 관객은 극장에 갇힌 채, 패턴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환각적인 효과와 긴 공연 시간 속에서 의식과 가수면 상태를 오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인도하는 것은 의미와 인과로부터의 해방이다. 극장에 떠오르는 텅 빈 공간은 어떤 내용이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수용되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점유하고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장소다.
그것은 자크 랑시에르가 『해방된 관객(The Emancipated Spectator, 2008)』에서 말한 ‘제3의 것’에 가깝다. 예술가와 관객의 일방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를 없애기 위해 무대와 객석의 구분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고 말했던 다양한 시도들, 그 일환으로 관객과 배우의 역할을 뒤섞고 거리에 나가 공연하기 시작한 많은 예술적 시도는 랑시에르가 봤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하나의 공동체로 상정하고 있으며, 그들이 예술가가 규정하는 방식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위계적인 전제를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가와 관객, 혹은 스승과 제자의 평평한 관계는 그 관계의 해체가 아니라 작품이라는 제3의 중재를 통해 가능해진다. 이 제3의 것, 즉 공연은 “양쪽 모두에게 낯선 것이며 [...] 누구도 소유하지 않은, 그 의미가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그러나 양쪽 사이에서 존속되는, 그 어떤 일방적인 전달이나 인과적인 정체성도 배제하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존재하는 공연은 예술가가 준비한 것을 관객이 지각하고, 느끼고, 이해했으리라고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이 지각한 것을 자기 나름대로 번역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지적 모험에 연결시켜 그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전용하는 것이다. 『해방된 관객』은 당초 200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5회 국제여름아카데미에서 랑시에르가 발표한 강의내용인데, 당시의 강의자로 랑시에르를 초청한 것이 스팽크베르크임을 고려하면 ‘해방된 관객’은 분명 스팽크베르에게도 중요한 의제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극장을 위한 작품>에서 관객은 분명히 극장이라는 물리적인 시공간의 속박 아래 놓여있다. 그러나 관객이 무대에 오르거나 극장이 거리로 나가는 것이 ‘해방’의 본질이 아님을 꼬집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진정한 해방의 시도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 존재하며 각자 해석하고 전유할 수 있는 제3의 것을 그 시작으로 한다. 이 작품의 경우 극장에 어느덧 생겨난 텅 빈 공백의 공간이 바로 그 중간 지대다. 앞서 말한 이 잠재성의 공간은 관객 그리고 예술가가 각자 어떤 새로운 것의 탄생, 변화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모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춤의 미래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상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개인적인 상실에 대한 위로일 것이다.
3. 나가며
<게르하르트 리히터, 극장을 위한 작품>은 여러 층위에서 페기 펠란이 말한 상실을 연습하고 애도한다. 누군가가 경험한 상실에 대해 듣고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형식을 통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목도하고, 또 그러한 반복 속에서 어떤 공허의 정동을 감각하게 된다. 상실에 대한 애도는 슬픔과 멜랑콜리 대신 풍경과도 같은 무심한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그러한 무심함이야말로 상실 다음에 올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야 말로 주체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춤이 고도자본주의에 반하는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과, 해방된 관객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이 오랫동안 마음에 머무르는 이유는 그 미적 경험에 있다. 상실의 에피소드 중 한 대목에서 ‘보상적 아름다움(collateral beauty)’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동일한 제목의 영화(Collateral Beauty, 2016)에서 ‘보상적 아름다움’이란 가족의 죽음과 같은 상실을 겪은 후에 이차적으로 느끼게 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앞서 멜랑콜리에 침잠하지 않는 공연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는 상실의 공허가 빚어내는 보상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빛이며 유한성의 예술인 공연이 올곧이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고 있는 찰나의 아름다움이다.
[참고문헌]
-Peggy Phelan, mourning sex: performing public memorie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7).
-Mårten Spångberg, “Gerhard Richter, une pièce pour le thêatre”, Kunstenfestival Program Booklet, (Brussels: KFDA, 2017).
-Gerhard Richter, Gerhard Richter: Early Work, 1951-1972, (Getty Publications, 2010).
-Mårten Spångberg, “Post-dance, An Advocacy”, Post-Dance, (Stockholm: MDT, 2017).
-Bojana Kunst, “Some Thoughts on the Labour of a Dancer”, Post-Dance, (Stockholm: MDT, 2017).
-Jacques Rancière, The Emancipated Spectator, translated by Gregory Elliott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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