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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riam Van Imschoot & Lucas van Haesbroeck <Nocturnes for a Society> 본문
Myriam Van Imschoot & Lucas van Haesbroeck <Nocturnes for a Society>
Time Fold 2024. 8. 17. 22:4823.05.28, Kunstenfestivaldesarts
작품은 강변에 어느 아름다운 공간에서 낯선 관객들이 모여 하룻밤을 지내며 함께 창작을 하고, 함께 소리를 만들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아침을 맞는 그런 공연이다. 도착하면 예쁘게 입은 가이드가 에코 슬리퍼를 나눠주고,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는 유리컵, 비즈가 담긴 그릇을 예쁜 포장에 싸서 준다. 모든 관객이 그걸로 소리를 내다보면 여기저기서 채집된 소리가 모여 일련의 변형을 거친 뒤 다시 공간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로 확장되어서 흘러 나온다. 10시 쯤에는 채식 스프를 나눠 먹고, 다 같이 아에이오우 소리를 내며 모닥불 같이 어두컴컴한 조명을 둘러싸고 원시 부족이 할 법한 챈팅을 한다. 12시부터는 잠을 자는 시간이다. 저마다 에어매트리스에 시트와 담요를 가져와 강물을 보며 잠든다. 아침에는 강 건너편에서 크로아상과 커피를 주는데 먹고 헤어진다.
실제로 진행된 내용들을 보면 어딘가 시적이고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1cm 정도의 표피에서 계속해서 머무르며 그 너머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벤트성 체험에 더 가까웠다. 오히려 그러다보니 알 수 없는 불편함과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렸는데, 이를테면 한창 가운데서는 "아름다운" 챈트를 다 같이 만드는 중인데 한 쪽에서는 맡아둔 매트리스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바람에 실랑이가 벌어지는 것을 봤을 때 (나부터도 미리 매트리스를 맡아둬서 잘 곳을 확보했다는 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밤에 모두가 자리를 잡고 누웠을 때 광경이 꼭 지진이나 홍수 난민들의 임시대피소처럼 느껴졌을 때, 그리고 강 건너에 침낭을 덮고 자는 노숙자들이 보였을 때,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아트피플들이 부시시한 눈으로 옹기종기 모여 커피와 크로아상을 먹는 동안 한 켠에서 자고 있던 노숙자를 한 컷 사진에 담을 수 있었을 때 (다른 노숙자들은 시끄러워서인지 사라졌다).
공동체, 함께하기, 일상을 말하는, 다시 말해 뭔가 삶에 가닿기를 추구했던 작품이 허위처럼 느껴진 것은, 작품이 삶을 말하면서도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이고 불편한 부분들이 완전히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밤 내내 에코 슬리퍼와도 같은 무균성의 편안함을 보장했고, 작품에서의 공존이란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내게 안전한 이들과의 불편하지 않은 하룻밤이었다. 타자와 연결을 시도하기 위해 반드시 어느 심리적 안전선을 넘어서야만 하는 위험한 과제는 주어지지 않았다. 적당히 느슨하게 적당히 눈인사를 해가면서, 적당히 낭만적으로 바람과 강변의 노을을 즐기고, 적당히 들려오는 적당히 현대적인 사운드를 들으며, 적당히 예의를 갖춰 암묵적인 룰에 맞춰 행동하다 끝났다. 작가는 낯선 이들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생겨나는 공동체를 추구했을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 모인 이들은 타자가 아니었다. 일정 수준의 지식과 경제 수준과 지적 능력과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진 소수의 특권적인 집단이었다. 진짜 타자는 이 안전한 버블 바깥에 놓인 자들이었다. 지진으로 집을 잃은 수재민들, 먼 고향을 떠나와 튜브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난민들, 당장 유리창 하나를 두고 강변 건너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 이 버블 안에서 따뜻한 스프를 먹고 노곤하게 창문에 기대어 있다가 문득 그 노숙자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진짜 타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내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대 예술이 위선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예전부터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의혹이었지만, 따뜻한 주홍빛 램프를 둘러싸고 앉아 원시부족을 따라하며 연대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 앞에서 그 죄책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구체적인 무게를 가지고 다가왔다. 다음날 아침 좋은 경험을 했다고 자축하며 크로아상을 먹는 내내 불과 2m 남짓 떨어져 있던 노숙자는 못 본 척 등을 돌리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이 동시대예술의 적나라한 단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예술 작품이 반드시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다뤄야 한다거나, 말 그대로 노숙자를 초대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예술이야말로 (실직이나 죽음이나 질병 등의) 실질적인 신변의 위협을 겪지 않고도 불편함과 공존하는 법을 연습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나의 생각을 되새기고, 위험하고 싫지만 나의 세이프티 존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보는 실험을 할 수 있는 장이 아니던가. 발리의 에어비앤비 방갈로 프로그램이나 청소년 여름 캠프가 아니려면 필연적으로 이 세계에 관해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모순을 지적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일상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궁극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경험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작품의 경우, 내가 단 한번이라도 나의 세이프티존을 넘어서서 낯선 이와 협상하고 불편을 극복하는 경험을 통해 타자와의 조우를 연습할 수 있었더라면, 현실이 덜 당혹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 세대의 많은 작품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가운데, 빻음을 피해가려는 예술의 노력이 모든 불편함을 거세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모두가 불편함 없이 타협하고 수긍할 수 있는 지점을 찾기에 급급한 나머지 허울만 무지개색을 띤 회색지대들이, 진짜 속살까지 빨갛고 진짜 뼛속까지 노란 지대들을 점점 덮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함께 이야기했던 친구의 말이 잘 요약하고 있다.
"예술은 강력한 사회적 실천을 이길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직접 사회 운동을 통해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엘리트 부르주아들이 자기의 도덕적 부채감, 죄책감을 해소하는 데 예술이 복무하고 있다. 사실 더 현실적으로 강력한 실천들은 예술 바깥에 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얘기하면서, 그 이상의 무언가가 없다면, 예술은 사회 운동에 언제나 효과가 못미치는 체험에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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