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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석, 김성희 「미래 예술」 발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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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석, 김성희 「미래 예술」 발췌

Time Fold 2019. 7. 30. 14:45

서현석, 김성희 「미래 예술」

스펙터 프레스/워크룸 프레스, 2016

 

1. 무대의 모더니즘, 혹은 '미래'의 잔상

 

pg.15

-마이클 프리드 「미술과 사물성」

"예술의 승리, 아니 생존은 점점 연극을 극복하는 능력에 상응하게 되었다. 예술은 연극의 조건에 가까워질수록 퇴폐한다."

 

pg.16

-여기서 프리드가 '연극성'이라 부르는 것은 (작품이 관람되는) '시간'과 (관객의) '신체'의 개입이다.

-그가 옹호하는 미술의 미학적 본질은 하나의 오브제가 함축하는 과묵한 숭고미에 있다.

-'연극성'이라는 것은, 회화가 '작품'으로서 물신적 순수성을 획득하기 위해 떨쳐버려야 하는 잉여적인 것들의 집합이다.

-20세기를 관통한 미술과 연극의 악연은 모더니즘이 만든 사상적 분쟁이다.

 

pg.17

-베냐민 부흘로가 말했듯, 한 세기에 걸쳐 회화의 재현 체계가 자기 비판의 거울 속에서 내장을 드러내는 동안, 연극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가면에 심취했다. 아방가르드가 기꺼이 내버린 '환영주의(illusionism)'라는 폐기물을, 연극은 알뜰하게 '예술'의 영역으로 보존했다. 아르토와 브레히트의 공략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복제로서 무대 현실은 20세기 내내 견고함을 유지했다.

-"(...) 회화가 한때 다른 예술 영역, 특히 연극, 문학과 공유했었던 묘사와 조형의 모든 관습들"은 연극의 핵심이자 미술의 "공표된 적"이 되었다. 

-회화가 거듭한 자기부정과 연극의 '불변'에 대한 아집은 모두 각자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론이었지만, 모더니즘 이데올로기는 둘을 대치시켰고, 둘 간의 관계를 잣대로 규범화했다. 

-연극은 모더니즘의 헤게모니에 남은 환영주의 신화의 유배지였다. 

-프리드가 '오브제'에 대한 물신적 신뢰를 고수한 까닭은 오브제가 모사의 전통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사유와 과정을 함축하며 역으로 유추시키는 오브제의 수행적 언술력에 미술의 고유한 생명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환영주의를 떨쳐버린 오브제는 '사유의 응집'이 되어 날개를 달았다. 모더니즘은 일종의 애니미즘이었다.

 

pg.18

-(연극 무대의) '네 번쨰 벽'을 위한 미학과 섞일 수 없는 (미술관의) '네 개의 벽'의 힘은, 외부 세계를 지시하는 즉각적 기호를 배제하고 폐쇄된 영역에서 창작의 가치를 자가적으로 성립시키는 제의적 자기 확인에 있었다.

-환영성을 배제한 철저한 자기비판. 이는 클레먼트 그린버그가 수호했던 모더니즘의 태도이자 정신이며 방법론이다. 

-'내재성(immanence)'을 전제로 하는 자가 명증. 존재의 범위 내에서 성립되는 자기 지식. 즉, "어떤 분야 자체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 분야의 특징적인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린버그가 논하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은 물론 파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입체적 관점 구성이다.

 

pg.19

-이는 20세기에 예술 매체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철학적 성찰에 대한 은유 내지는 매개로 등극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특정 매체의 물질적 특성에 대한 탐구로 귀착된다. 이를테면 회화 작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들을 (인물이나 정물 대신) 작품의 대상이자 초점으로 삼음으로써 회화라는 전통을, 예술을 재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형식의 변혁이 곧 삶의 변혁이라는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지탱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부흘로가 말하듯, 연극성은 오브제의 특수성을 공략하기 위한, 미술의 마지막 전통적 성역을 붕괴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 미술의 내부로 침입했다. 연극성을 수용함은 곧 "미학적 체험/지식을 융화하는 특권을 누리는 좌위로서의 '시각적 오브제'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탈구시킴"을 의미했다. 

 

pg.20

-실로 '모더니즘'은 그로써 빨리 낡아갔다. 1990년대 말 로절린드 크라우스가 그린버그의 태도를 일컬으며 '환원주의적'이라 표현한 것에는 자기비판의 사유를 특정하게 '축소'한 내재성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 섞여 있다.

오브제로부터 탈구된 모더니즘의 정령은 노마드처럼 자유로워졌다. 내재성을 배신한 대가로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을 상실하고도 말이다. 

-노마드가 된 모더니즘의 정령은 오늘에 이르러 가장 역동적인 혼재향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곳에 '연극성'이 있다.

-레만은 공연 예술의 '뒤처짐'이 높은 제작비 때문이었다고 자위한다.

-하지만 무대가 모더니즘과 결별했던 맥락에는 레만의 해명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복합성이 존재한다.

 

pg.21

-[공연예술의] 복합성/다원성/혼혈성/조직성/집단성/혼재성이 문학, 회화, 조소 등에서 개인적으로 탐구되는 문제의식을 수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모더니즘이라는 애니미즘을 흡착할 만한 중심적 오브제는 공연 예술에 없다.

-'원초성(primitivity)'이라는 신화다. 원초성은 매체에 대한 집중과 더불어 모더니즘을 이끈 또 하나의 원동력이다.

-(결국 모더니즘 예술은 유럽 식민주의가 남긴 부와 문화 중심주의, 그리고 이성 철학의 부산물인 셈이다.)

-마셜 코언이 말하듯, 원초성이라는 이상은 모더니즘이 구현되는 방식으로서 '통합'이라는 방법론을 지탱했다. 모더니즘은 예술의 여러 영역에 자가적 논리로써 스스로를 규명해야 할 필요성을 부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영역들이 통합되는 가능성을 이상화했다. 

 

pg.22 

-문명의 가장 원형적인 제의에 분명 모더니즘이 참조, 복구해야 할 근원적인 창의성이 존재했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코언이 기술하듯, 예술의 융합이 중요시된 것은 단순히 이를 통해 상실한 원초성이 복원되기 때문이 아니라, 원초적 예술의 본질이 하나의 감각적인 효과로 구현되기 때문이었다. 그 본질이란 이미지와 현실의 일치다. 기표와 기의, 재현과 정신의 통합이다. 즉 매체가 모더니즘의 이상적 상징이었다면, 또 하나의 모순적인 방향성은 매체를 은폐하는 것이었다. 

-연극과 무용에서 원초성은 '재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발터 베냐민이 말한 사진의 '제의적 가치'는 무대 위에서 더욱 모질게 모더니즘의 냉철함을 견뎌냈다. 

-제의적 가치가 군림하는 장에서 '매체에 대한 비판'은 힘을 가질 수 없었다.

-1960년대 이후 미술에 임대된 '연극성'이 (프리드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의 정령을 '오브제'를 넘는 시공간의 무한한 궤도로 발산하는 동안, 정작 연극은 모더니즘의 위협으로부터 무대의 '내재성'을 견실하게 지켜냈다. 20세기에 독립된 내재성을 끝까지 지킨 쪽은 미술이 아니라 연극인 셈이다. 

 

pg.23

공연예술의 모더니즘은 내재성에 대한 전제나 질문을 통해 자생적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레만이 꼬집듯, 무대에서의 변화는 다른 예술 영역에서 나타났던 방법론들을 뒤늦게,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그나마 나타났다. ..연극이나 무용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자기비판'의 방법론은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모던'이라는 수식어는 특정한 '시대' 혹은 '교리'를 지칭하는 서술어로 축소되었다. 

-'현대연극'이라든가 '현대무용'의 '현대'로 번역되는 '모던'은 '자기비판'으로 지탱되지 않았다. 스타일상 변화가 있었을 뿐, 무대에서의 환영적 볼거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뼛속 깊이 장착하지는 않았다. 연극과 무용은 각기 문학과 음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공연예술에서 모더니즘은 도래하지 않았다. 

 

pg.24

-'모더니즘'은 특정 시대가 아니다. 예술에 대한 태도의 변화다. 

 -'모더니즘' 영화가 문학광 연극, 즉 '드라마'로부터 탈피하려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포스트드라마 연극' 역시 말 그대로 전통 연극의 절대적인 '드라마' 기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pg.25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틀 안에서 다루지 않는 이유는) 그가 다루고자 하는 작품들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성향들이 혼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그러한 것처럼 공연 예술에서도 더 이상 정확한 실용성이나 구체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베인스가 말하듯, '포스트모던 무용'이라는 것 자체가 일관된 미학적 태도로 설명되지 않는다. 무용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던 안무가들을 한데 묶는 공통점이 있다면, 관습의 타성을 공략하고 과감한 형식적 변혁을 이루고자 하는 절실한 의지, 즉 '모더니즘'이다. 

-무용계에서의 시대착오적 혼란, 그러니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이 묘연해지는 개념적 구멍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모더니즘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이기도 한) 20세기 공연 예술의 혼재향적 정체성이다.

 

pg.26

-무대에 던져진 모더니즘의 신탁은 늘 거북하고 이질적인 그 어떤 낯섦이었다. 

-이는 매체에 대한 성찰이라는 모더니즘의 숙제 자체가 무대 위에서 벌어지기에는 도리어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대를 '내재성'을 가진 구체적인 물성으로서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공연 예술에서의 '매체'의 문제에 대한 성찰은 그린버그 이후 겪어온 모더니즘 성찰의 역사적 궤적과 맞닿는다.) 로절린드 크라우스가  「북해에서의 항해: 탈매체 환경 시대의 미술」에서 말하는, 1970년대 이후 모더니즘의 사유적 확장이 그것이다.

-크라우스가 '환원주의적 모더니즘'이라 부르는 물질특정적인 자기비판은 회화와 조소에서 사진, 영화로 번졌고..

-영화에 이르러서는 모더니즘의 '물질'에 대한 배타적 집중이 ('탈매체'의 '포스트'라는 접두사가 함축하듯) 그로부터의 '파생'이자 '이탈'로서의 모순적인 파장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pg.27

-이른바 '탈매체'적이라고 하는 이러한 성향은, 매체의 근원이 더 이상 캔버스나 셀룰로이드 필름과 같은 특정하고 단일한 구성 요소로 환원되지 않고 혼성적이고 복합적인 예술의 매커니즘에 대한 사유로 확장됨으로써 나타났다. 

-회화나 조소에 적용되지 않았던 성찰의 다원적 층위가 영화로 인해 촉발된다. 

-이러한 매체의 '구성적 다원성'은 회화에서 향유되었던 단일한 '환원적'의미로서의 '매체'라는 용어에 담길 수 없었다. 

-그 축소된 스케일을 보완하고 대체하는 다른 개념이 필요했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그 대체적 용어가 '장치(apparatus)'였다. (다원적 총체)

 

pg.28

-이어지는 이후의 미술사적 흐름은 '장치'의 다층적인 물질성마저도 뛰어넘는, 보다 입체적인 혼성으로서 예술을 재규정하는, '탈매체'적인 태도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즉물적이기보다 개념적이고, 결과물보다 과정이 중시되며, 평면적인 전시 형태를 배제하고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담론으로서의 미술 행위에 의해서 말이다.

-물론 크라우스는 (이러한 작품들이 대부분 '매체에 대한 성찰'이라는 역사적 유산과 단절되어)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휨쓸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아무것도 없는 어떤 빈 공간을 가상하고 그것을 빈 무대라 불러보기로 하자. 어떤 이가 빈 공간을 가로지르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연극 행위로서 구성 요건은 충분하다." (피터 브룩) // 장치로서의 연극의 정체성 함축

 

pg.29

신체, 텍스트, 조명, 의상, 소품, 몸짓, 극장이라는 건축적 장치 등 온갖 물질적, 비물질적 부분 요소들의 복합적 총체가 연극이고 무용이다. 이러한 혼성적 정체성을 사유하기 위한 적절한 개념적 도구는 분명 '매체'가 아니라 '장치'가 맞다. 

-공연 예술에서는 모더니즘의 숙제가 '이미 확장된' 사유에서 시작된다.

-연극은 미학적인 행위 자체와 그것을 수용하는 행위가 '지금', '여기'에서 실재적으로 발생한다." 한마디로 "실재의 모임"이다. 이는 개념 미술 이후 미술이 추구해온 지향점에 중첩된다. 

-감각과 사유의 '발생'으로서. 공동체로서. 

 

pg.30

-할 포스터가 간파했듯, 1980년대 이후 미술은 "매체의 표면으로부터 미술관의 공간으로, 제도적인 틀로부터 담론적인 네트워크로" 그 영역을 전환해왔다. 완결보다 과정이, 기교보다 소통이, 감동보다 감각이, 정확한 정체성보다 가변적인 관계의 역동성이, 개인의 무의식 탐구보다 사회적 역동성의 수행이, 더 중요해졌다.

- '실재의 모임'이야말로 결과물 중심의 기반에서 탈피하려는 현대미술이 그려온 이상 속에서 꿈틀거린다. 

-그 궤적의 주변에서 시각 미술과 공연 예술은 새롭게 만난다. 

 

pg.31

-[모더니즘의] 숙제란 끊임없는 자기 질문이다. 크라우스는 그 과제가 진부함으로 치부된 것과 동시대 미술이 자본주의에 종속되고 만 것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한다. 

-'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큰 오독과 오해는 '내재성'을 관념적 도그마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매체의 미리 전제된 속성들에 따르는 경직된 방법론적 체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정신은 특정한 계율이나 스타일 혹은 학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있다. 

-모더니즘의 정신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필요하다. 모더니즘의 정신이 없다면, 후기 자본주의로부터 예술이 스스로를 구원할 실낱같은 마지막 단서마저도 조형적 자위가 될 수밖에 없다. 

 

pg.32

-모더니즘은 '변형'을 위한 '새로움'의 스타일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예술 행위에 대한, 그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집요한 의문과 도전이다.

-오늘날 모더니즘은 공연 예술을 바꾸고 있고, 공연 예술은 모더니즘을 재고하고 있다.

-무대에 '던져진' 모더니즘의 화두들은 현실에서 공명한다. 

 

2. 연극이란 무엇인가? 

 

pg.35

-20세기 연극에서 분명 연극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활발했다. 적어도 '이론'으로서는. 

-(피터 브룩의 연극의 정의)는 즉각적 '발생'으로서 '연극'의 기본을 적확하게 말한다. (그린버그 미학의 유전자를 발견할 수 있다.)

 

pg.36

-최소한의 발생과 시선,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장소. 이들이 이루는 '지금'의 현현. 이것이 연극이다. 

-'현대연극'의 아성이 '모더니즘' 예술과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지점이 있었다면, 매체의 본질을 사유하고자 하는 의지와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남긴채 나머지를 '제거'하는 사유의 방식이다.

-그로토프스키: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 필요하다는 것이 거의 명백하죠. 말하자면 무슨 이유로 '그것이 없다면' 연극이 존재할 수 없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 배우와 관객

-스즈키 다다시: 관객과 배우가 동시에 공존하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

-스타니슬랍스키: 연극은 배우와 관객 사이에 이루어지는 심미적 체험

 

pg.37

-연극에 대한 20세기의 전형적인 사유는 관객과 배우의 질적인 만남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들의 '연극'에 대한 정의에 좀 더 충실한 작품들은 어쩌면 매우 '실험적'이거나 '도발적', 심지어는 '비연극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들의 단아하고 깔끔한 정의는 실질적인 연출 과정에서 짊어지게 되는 많은 '보족적' 장치에 의해 비대해져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pg.38

-'제거'의 논리는 스스로 '제거'되었다. 연극의 '본질'은 무대에 오르지 않는 신기루였다. 모더니즘의 성찰은 무대 밖의 죽은 '원론'일 분이었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그다음에 온다. 떨쳐버림으로써 얻는 것들은 무얼까?

 

1) '내면'의 이면

pg.40

-20세기 연극은 인간 '내면'에서 시작된다. 

-모든 허상에 대한 위대한 전쟁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는 인간의 내면이다. '내면'은 20세기 연극의 영혼이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내적 원동력"을 발굴할 것을 지시한다. (...) 무대에서의 모든 행위는 근원과 목적을 가진 '실천'이어야만 한다. 내면으로부터의 '진정성'으로 무대를 정화할 때 '사상과 정서적 경험의 진정한 가능성이 도래한다. 

 

pg.41

-그로토프스키의 연기론에서 연기자는 (...)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 

 

pg.42

-피터 브룩은 연기자의 진정성이 스스로의 한꼐를 극복해 초월적인 경지에 이르는 순간을 일컬어 "뻥 둟린다"라고 표현한다. (...) 브룩은 스타니슬랍스키의 방법론이 타성의 패턴에 종속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수정론으로, 브룩은 매번 생경함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연극의 무궁한 원천으로서 '내면'을 갱생하고자 한다. 

-[내면의] 기원은 18세기부터 구체화되는 '주체성'에 대한 낭만주의 담론이다. 그 결정적 단초는 셰익스피어였다. 엘리너 푸치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서 유추되는 등장인물의 개인적 사유와 감정은 고대 연극과는 다른 풍부함을 제공했고, 이는 플롯과 모방 등으로 이루어지는 '비극'의 핵심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낳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행동'은 '내면'으로 대체되었다.

 

pg.43

-인간의 영적 기반을 부정한 모더니즘의 도래 이후 '주체'의 해부학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아니 모더니즘은 아예 '인간' 자체를 예술의 영역에서 축출했다. 

-20세기의 철학적 존재론은 자아와 주체의 신화적 존립을 용인하지 않았고, 재현의 무대는 더 이상 성역으로 남지 못했다. 개인은 '내면'에서 탈구되었다. 주체는 (자크 라캉의 말대로) 언어의 효과이거나, (미셸 푸코가 말하듯) 사회적 과정에 의한 산물(construct)에 불과하다. 

-['행동(action)'에] 비교될 만한 '부수적' 개념으로 바르트가 제시하는 개념은 '제스처'다. '행동'이 특정한 대상과 의미를 촉발한다면, '제스처'는 "행동을 특정한 정서로 둘러싸는 동기, 충동, 게으름의 불확정적이며 소진되지 않는 총체"다. 전자의 목적성을 배제하고 정확한 의미로부터 해방되어 해석의 지평을 넓게 여는 것이 후자다. 전자가 고정적이고 체계적이라면, 후자는 유동적이고 수행적이다.

 

pg.44

-'제스처'는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기능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바르트가 강조하는 '텍스트'는 이를 수용하는 독자의 능동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창의적이고 수행적인 것이다. 

-'제스처'의 미학은 다양한 해석의 지평을 열어주는 유기적 과정의 실행이다. 

 

pg.45

-전자가 원칙과 규범으로 정제되는 고정된 언어적 의미로 귀결되는 한편, 후자는 불분명하고 한시적이면서도 무한한 의미의 확장을 시사한다. 

-작가 중심의 해독 행위에서 독자 우선의 행위적 해독으로 전환되는 패러다임을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상징적인 말로 표현한다.

-텍스트는 작가의 내면적 체험을 근거로 이루어진 독자적 의미 체계가 아니라 무수한 문화의 중심들로부터 유인되는 복합적 유기체다. 말하자면 "인용들의 짜임"이다. 

-바르트가 제시한 문제의식이 문학평론에 그치지 않고 언어와 소통 및 예술적 표현에 관한 관점의 총체적인 변혁으로 이어진 까닭은 한편으로는 '작가(author)'의 '권능(authority)'에 대한 신화적 믿음을 본질적으로 파헤쳐야 하는 필요성을 부각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말대로, "언어는 '인간'이 아닌 '주어'를 알 뿐이다."

 

pg.46

-'작품'은 문화적으로 작동하는 무한한 의미의 망에 기생하는, 그로부터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적 지점들의 조합일 뿐이다.

-주체의 존재론적 기반에 총체적인 질문이 가해진 이 시대에 '내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재현 연극의 '생명'이 연기자의 내면에 있다면, 오늘날의 '내면'은 무한한 관계의 망으로 대체되어 있다. 

-''생명'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몫이다. 저자의 죽음'이 상징하는 텍스트의 개방이 초대하는 유기적인 소통의 장이 무대에서 이루어질 때, 주인공은 더 이상 '내면을 현현하는' 연기자로 존립할 수 없다. '연기자의 죽음' 속에서 '내면'은 더 이상 순수한 척할 수 없다. 

-로절린드 크라우스가 외부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순수하고 독립적인 내부를 설정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피력한 것은 순수성의 종식을 의미한다. 

 

pg.47

-'제스처'의 언어가 촉발하는 '의미'의 체계는 다각적으로 열린다. 열린 소통의 세계에 들어서는 관객은 복합적인 의미의 체계를 '해석'하는 대신 '횡단'할 뿐이다. 

-'내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신화에 대한 재고이자 인간에 대한 통찰이다. '내면'의 빈자리는 사유의 새로운 지평이다.  

 

[작품 사례]

-안토니아 베어 <웃음> 

-마나베 다이토 <얼굴 전기 자극>

-라 리보트 <웃음 구멍>

-캐서린 설리번, 숀 그리핀, 여행자 <영매>

-히라타 오리자 <사요나라>

-뱅상 뒤퐁 <외침(미니어처)>

 

2) 인물의 근원

 

pg.74

-'인격'은 근대의 위대한 유산이다. '주체'의 연극적 현현. 아니, 연극의 근대적 현현. 인격과 연극은 18세기의 가장 강력한 궁합이었다.

-'심리적 사실주의'는 20세기 연극을 지배했다. 20세기 의 연극 이론가와 연출가들은 그 설득력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았다.

-그러나 '인물'의 역사는 그처럼 하나의 일관된 개념으로 엮이는 연속성의 서사로 완성되지 않는다. '주체'라는 개념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고대와 근대 사이 엄청난 사유의 간극을 절대 간과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피오레, 앨리너 푸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독)

 

pg.75

-오늘날에는 비극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현대적 관점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푸치에 따르면, 20세기 연극의 심리적 사실주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영국의 비극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면서 잉태된 시대적 산물이다. 16~17세기 영국 연극을 기반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인물의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대두된 것이다. 

-벨피오레는 단호하게 말한다. "가면의 이면에는 아무런 (심리적)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주체는 상징 질서에 '봉합(suture)'된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 혹은 '나'와 같은 대명사가 그 매개다. 언어 주체는 발화를 해 허상적 지시어에 '봉합'된다. 봉합은 주체가 상징 질서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한 계약적 결탁이다. 

 

pg.76

-모방은 무대 위의 작위적인 상징 질서에 연기자를 '봉합'한다. 삶의 계약적 관계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다면, '봉합'의 흡착력과 주체의 고유성에 대해 비판적 의구심이 작동한다면, 연극적 봉합에 대한 재고 역시 무대를 관통할 수밖에 없다. 

 

[작품 사례]

-오카다 도시키/체루핏추 <3월의 닷새> 

-라이문트 호게 <조르주 망델가 36번지>

-필리프 피에를로, 윌리엄 켄트리지, 핸드스프링 퍼핏 컴퍼니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율리시즈의 귀환>

 

3) 재현의 먼 지평

 

pg.89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극을 이끄는 동력은 '행동'이다. 그가 말하는 '행동'이란, 단순한 신체적 양태가 아니라 정확한 목적을 가진 실행, 즉 의도의 구현이다. 

-'행동'은 모방되는 것과 모방 자체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러한 이중성은 20세기 연극을 지탱하는 사상적 모태였다. 모방되는 것이 단지 단선적 외양이 아닌 통합적 총체성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그 자체로서 연기자의 사유를 통합하는 총체성으로 작동했다.

-한스티스 레만이 말하듯, 19~20세기에 구축된 모방과 행동과 드라마의 삼위일체는 '연극'을 드라마에 종속시키는 결정적 장치가 되었다.

-'드라마'를 초월하는 '연극'에 대한 레만의 열정은 인간에 작위적으로 총체성을 부여하는 권력 장치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열정이다. 

 

[작품 사례]

-포스드 엔터테인먼트 <스펙타큘라>

-에바 마이어켈러 <데스 이즈 서튼>

-마레이스 불로뉴 <해부학 수업>

-사이먼 후지와라 <재회를 위한 리허설(도예의 아버지와 더불어)>

-로메오 카스텔루치/소치에타스 라파엘로 산치오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개념에 대하여>

 

4) '연극적' 교감의 조건들

 

pg.108

-관객은 연극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가? '연극적' 교감의 방식은 얼마나 다양한가?

-20세기의 프로시니엄 무대와 관객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획일적이다. 특정한 허구적 인격을 내면에 장착한 배우들이 무대에 입장해 발생함직한 상황을 연기하고 관객이 이에 동화되는 교감 형태는 20세기 연극 무대를 지배해왔다. 

-20세기의 연출론은 이러한 일률적인 방식을 지탱하고 강화하기 위해 고대에서 역동적인 개념을 빌려왔다. 미메시스(mimesis).

 

pg.109

-주로 '모방(imitation)'으로 번역되는 '미메시스'는 무대가 현실에 대해 갖는 관계를 설정하고 나아가 관객이 무대에 관계 맺는 방식을 결정하는 개념으로 응용되어왔다.

-미메시스에 대한 논란의 단초를 제공한 「국가」에서 플라톤은 시를 포함한 예술이 '이데아' 대신 눈에 보이는 현상을 '모방'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 10장의 구절이 유명해진 것도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가 자연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고 외형만 반복적으로 모방한다는 비판이 주는 자극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예술을 인정하는 근거는 예술이 단지 현상에 대해 외형적인 유사함만을 추구함을 넘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근원을 탐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무한한 현실과 경험으로부터 인식 가능한 지식을 추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현실에서는 인식 불가능한 경험적 요소가 예술로 인해 현현할 수 있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메시스는 예술만의 방법론적 영역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지식 탐구의 경로가 된다. 

 

pg.110

-마이클 데이비스는 걷기와 춤추기를 비교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미메시스의 방법론이 결국 걷기에 상응하는 거친 경험의 영역에서 춤추기와 같이 잉여적인 새로운 형태로 확장하는 행위임을 피력한다. 

-카타르시스의 미학이 오늘날까지 권능을 갖는 까닭은 미메시스가 거친 현실로부터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성질을 추출해내기 때문이다. 

-미메시스는 고대 이후 변신해왔다. 자크 데리다가 말하듯, 그 궤적은 '자연(physis)'에서 (칸트를 전환점으로) '생산'으로 이어졌다. 

-허구, 모사, 가짜, 환영 등 20세기를 종횡무진 누빈 개념들이 미메시스라는 묵은 단어와 결탁하게 된 것은 근대의 현상이다. 

 

pg.111

[데리다가] 말하는 미메시스는 웒여이 결핍된 텍스트로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의미를 생성하고 유보(defer)시키는 과정이다. 차연(différance)이 곧 미메시스의 원칙이며, 이는 역설로서의 미메시스의 기능을 수행적으로 작동시킨다. 

-연극 연구가 대니얼 랄엄과 같이 미메시스의 의미적 중층을 조명하는 학술은 고대의 미메시스 담론에 대한 학술적 정밀함의 필요성에 힘을 싣는다. 

-[언어적 행위의 미메시스를] "주체 자신의 내면에서 타자를 불러일으키는" 신체적이고도 간주체적(inter-subjective)인 과정으로 규정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자연을 정복하려던 계몽주의와 자연 과학의 공모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친화적인 감각으로 미메시스를 재설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미메시스란 "외부 세계에 대한 내면의 순응"이며 예술이 이를 복원함으로써 계몽주의가 종용해온 자기중심적인 사유로부터 벗어나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pg.112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드러낸 바와 같이, 미메시스라는 개념의 핵심은 그 개념에 잠재된 의미의 유연한 확정성에 있을지 모른다. 

-미메시스가 고대의 무대와 삶 속에서 어떤 작용을 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예술의 특정한 방법론이나 스타일과 거리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것은 신체와 언어, 이성과 감성을 아우르는 역동적인 교감의 의미로 플라톤의 사유를 흐른다. 

-어쩌면 미메시스에 대한 해석은 그것을 바라보는 각 시대의 사유 체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pg.113

-멀리 떨어져 있는 익명의 집단에 대해 프로시니엄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모방'이라는 방식으로만 인식한다면 그처럼 제한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미학은 없을 것이다. 

-[프로시니엄은] 관객의 개체성을 하나의 집단으로 평면화하는 권력을 지닌다. 

-감정의 획일적인 동화를 종용하고 주체들의 관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잠재적 방식들을 차단한다. 

-미메시스의 퇴색된 의미가 연극을 속박해왔음은 사실이지만, 연극의 시급한 사명은 미메미스의 근본적 의미와 기능을 소환함을 넘어 미메미스 담론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이다. 

 

[작품 사례]

-우메다 데츠야 <대합실>

-제롬 벨, 극단 호라 <장애 극장>

-리미니 프로토콜 <100% 베를린>

-오카다 도시키 <야구에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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