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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 발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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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 발췌

Time Fold 2019. 8. 2. 18:00

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

장소미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2011

 

pg.23

확실히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일종의 부활이거나 복수다.

 

pg.92

그 대조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인공위성사진이 희미한 파란 얼룩이 흩뿌려진 어느 정도 균일한 초록색의 죽 한 사발에 불과해 보였다면, 지도는 지역구분선, 생동감 있는 길들, 지도의 시점, 숲, 호수, 언덕들의 그물망을 화려하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두 확대사진 위에는 검은색 대문자로 전시회 제목이 쓰여 있었다.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pg.270

"예술은 중세 이후 퇴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라파엘전파들의 기본적 생각이었어. 르네상스 초기부터 일체의 영성이나 진정성과 단절된 채 순전히 산업적, 상업적인 활동으로 전락했다는 거였지. 보티첼리건 렘브란트건 레오나르도 다빈치건,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이란 사람들도 알고 보면 대기업의 CEO 같다면서 말이다."

 

pg.271

"그로피우스 역시 사상적 고민이 더 많은 사회주의자였지. 1919년 '바우하우스 선언'에서 그는 예술과 수공예의 차이를 초월하겠다고 공포하고서,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강령과 정확히 일치하는 바지."

 

pg.273

인간의 삶은 대개의 경우 보잘것없다. 인생은 한정된 몇 가지 일화로 간단히 요약돼버리고 만다.

 

pg.277

사람의 목소리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눈빛 또한 목소리 못지않게 변하지 않는 부분이다. 대개 노화가 무엇인지 한눈에 보여주는 육체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와 눈빛만은 끈질기게 건재해, 성격이나 꿈, 욕망 등 한 인간의 개성을 결정짓는 모든 것을 가혹하리만치 반박할 수 없게 증명한다.

 

pg.310

"난 이제 소설이나 영화 같은 내러티브의 세계와는 얼추 끝난 것 같소. 음악도 마찬가지고. 이제 내 관심사는 오직, 시나 그림 같은 병렬적 세계요."

 

pg.320

"윌리엄 모리스의 핵심 원칙은 중세와 마찬가지로, 착상과 제작이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거였소. (...) '모리스 회사'는 처음부터 줄곧 흑자를 기록했소. 이것은 푸리에의 팔랑스테르나 카베의 이카리아 공동체나 할 것 없이, 19세기를 통틀어 번성한 그 어떤 노동자 협업체제도 도달하지 못한 유일한 사례요."

 

pg.323

그는 자신이 세상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에 투신하게 된 이유, 심지어 세상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언뜻 떠올렸다. 세상은 감동적인 예술의 주제가 되지 못하며, 그 자체로는 특별한 재미도 마력도 없는 이성적 장치로 나타나는데 말이다.

 

pg.443

제드는 죽음과 고통에 관련된 사업의 주가가 쾌락과 섹스 사업의 그것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몇 년 전에 데이미언 허스트가 제프 쿤스에게서 세계 미술시장의 넘버원 자리를 빼앗은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pg.472

전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이한 시기였다. 대부분의 서유럽인들은 자본주의가 시한부를 선고받았다고 믿는 듯했고, 더구나 마지막 날이 임박한 시한부 선고였음에도 극좌 정당들은 그악스러운 마조히스트들의 고정 후원을 넘어서는 지지는 얻어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사람들의 영혼에 재의 장막이 드리운 듯했다. 

 

pg.507

당시 제드는 공장들이 가동을 멈춘 지 한 세기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주변을 위협적이리만치 울창하게 에워싼 숲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새로운 문화적 소임을 부여받은 공장들만이 복구되었고, 나머지는 차츰차츰 무너져갔다. 한때는 독일 생산력의 정수가 응집돼 있었던 이 거대산업 지역은 이제 녹슬고 반쯤 붕괴되었으며, 울창한 식물들이 옛 공장들을 점령하고 폐허 속을 파고들어 점차 뚫고 들어갈 틈이 없는 정글을 이루었다. 

 

pg.508

이 미래도시 또한 스스로 분열되고 붕괴되어, 무한히 뻗은 식물성의 고아막한 공간 속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듯 보인다. 이런 당혹감은 제드 마르탱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함께했던 인간들을 소재로 한 작품, 즉 혹독한 기후의 영향을 받아 분해되고 박리되고 산산이 찢겨나간 사진들을 촬영한 영상을 마주할 때도 계속된다. 아마 이것이 인류의 전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리라. 화면 속에서 그 사진들은 켜켜이 쌓인 식물의 사진들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더니, 얼마간 방버둥치다가 이내 완전히 묻혀버리고 만다. 이윽고 정적이 흐른다.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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