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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카 쿠르니아완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발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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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카 쿠르니아완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발췌

Time Fold 2019. 9. 18. 00:49

에카 쿠르니아완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옮긴이 박소현, 도서출판 오월의봄, 2017

 

pg.122

전쟁포로 구출은 계속되었다. 국제적십자가 도착했고 전쟁 포로 모두를 즉각 유럽으로 이송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이 나라는 '문명인'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수용소에 3년이나 갇혀 있었던 전쟁포로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원주민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곳곳에 무장한 민병대가 출몰했다. 스스로를 국민군이나 인민군이라고 부르는 이 게릴라들은 도시 바깥에서 활동했다. 대부분은 일본군 점령기에 일본군에게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다. 네덜란드군에게 훈련받고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에 가담한 원주민과 게릴라인 원주민이 마주치기도 하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원주민들은 이 전쟁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pg.156

일본 점령기에 창녀가 돼버린 후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서러운 일도 많았지만 가끔은 좋은 일도 있었다. "여자는 모두 창녀가 아닌가. 현모양처라는 여자들도 결국 몸을 팔잖아. 지참금에, 생활비에, 아니면 사랑에. 사랑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는 건 아니야. 아니 실은 정반대지. 나는 사랑으로 몸을 팔아. 네덜란드인 집안에서 가톨릭 신자로 자라, 결혼하면서 알라만을 믿는다고 맹세하고 무슬림이 됐고, 결혼도 해봤고 종교도 가져보았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믿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랑도 잃은 건 아냐. 성인이나 수피교도처럼 말이야. 누구든 무엇이든 사랑해야 하는 창녀가 됐지. 자지도, 손가락도, 쇠족도 사랑해야지."

 

pg.207-208

"사탕수수 농장의 설탕공장에는 노동자가 수천이야. 노동자들은 쉬는 날도 없이 1년 내내 이라지만 농장주들은 주말이나 휴가 때면 고원에 있는 별장에서 편히 쉬지 않니. 노동자들은 이번 월급날에서 다음 월급날까지 간신히 먹고살 만큼만 벌지만, 농장주들이 걷어들이는 수입은 어마어마하지 않니. 차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반란을 일으켜야 해. 우리가 가슴속에 담아둬야 할 마르크스주의 구호는 이것뿐이란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신을 믿으시나요?" 클리원이 물었다. 

"그건 상관없는 문제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인간이 관여할 일이 아니야. 특히나 눈앞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목을 칼로 찌르고 있을 땐 말이지." 살림 동지가 대답했다. 

 

pg.211

클리원은 일주일 내내 길가에 앉아 살림 동지가 말하던 불쌍한 사람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얘기해주던 바로 그 사람들을 보았다. 부스럼투성이 아이를 안은 거지 옆으로 독일제나 미제 차를 탄 사람이 지나갔다. 식모 아이가 장바구니를 들고 상전에게 양산까지 받치며 잘 차려입은 어린 여주인을 따라갔다. 클리원은 이 모든 사회적 모순을 두 눈으로 보고 남들이 고된 노동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데 젊은 놈이 사랑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스스로에게 일러주고 싶었다. 

 

pg.301

"공산주의자란 놈들이 늘 그렇지." 쇼단초가 말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게 썩을 수밖에 없는지 모르는 딱한 자들.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신은 천국을 약속하신 거라구. 딱한 자들을 위로하려고 말이야."

 

pg.324

매일 보던 노을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전에는 노을을 보면 알라만다와 모래사장에서 보냈던 아름다운 노을을 생각했지만, 그날의 서늘한 하늘은 조용하고 처량한 게 마치 메말라 비틀어져가는 제 마음을 비춰놓은 것 같았다. 클로브 담배를 피우면서 혁명이 정말 일어나긴 일어날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하긴 한 일일까 생각해보았다.

오래전 집 근처 모스크에서 이맘이 천국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발밑에 우유가 강처럼 흐르고 아름다운 처녀 요정들이 사방에서 유혹하는 곳이라고 했다. 천국에 있는 것은 뭐든 취해도 되며 금지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천국의 모든 것은 믿을 수 없이 아름답다고 했다. 클리원은 천국이 그렇게까지 대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모두가 똑같은 양의 쌀을 얻을 수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제 꿈이야말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pg.337

하루는 공산당이 성화를 해대 어린 학생들이 군형무소에 수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애들이 한 잘못이라곤 학교에서 파티를 벌이다가 무대 위에서 로큰롤을 부른 것뿐이었다. 하지만 쇼단초는 공산당의 요구를 따랐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미나의 걱정은 분노로 변했다. 공산당사로 쳐들어가 아들을 몰아세웠다. "이럴 수는 없다." 미나는 아들의 사무실 한복판에서 소리쳤다. "너도 예전에 기타 치며 그런 노래를 부르고 다니지 않았더냐? 너희 모두 안 그랬단 말이냐?"

[...]

클리원 동지는 멈추지 않았다. 시의회, 군대, 경찰 모두에 압력을 넣어 썩어빠진 서양 팝음악 레코드를 압수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집 안에서 몰래 들었다고 해도 체포하게 했다. "미 제국주의 타도! 썩어빠진 제국주의 문화 분쇄!" 클리원 동지는 어디서건 외쳤다. 당은 미국 문화에 반대하는 대신 하층계급의 민속예술은 적극 장려했다. 그런 민속예술 공연에는 물론 당의 선전이 끼어들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이전부터 늘 무시당해오던 민속예술에 전성기가 도래했다. 공산당 창립기념일이면 신트렌 공연이 열리는데, 주인공 소녀가 양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더 예뻐진 얼굴로 낫과 망치를 들고 나오는 식이었다."

 

 

<해설>

 pg.534

달랑은 즉흥적으로 시사적 사안에 대해 발언하거나 정부를 찬양 또는 비판하는 등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기도 한다. 즉 와양에서 현실 사건과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새로운 이야기가 되거나 기존의 이야기에 합쳐진다. 그런 면에서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의 화자는 와양의 달랑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 이질적인 요소들을 끌어와 기상천외하고 다층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면서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하는 화자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나간다. 

 

pg.536-537

이른바 윤리적 통치가 선포됐다. 원주민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제한적으로나마 원주민들은 유럽식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고,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교육을 받은 소수의 엘리트들은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진 주체가 되었고, 이들 중에서 20세기 민족주의 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싹트기 시작한 민족주의와 '인도네시아'라는 '상상된 공동체'에 대한 구상은 식민주의에 대한 식민지의 근대적 응답이었다. 식민지 이전에 통일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인도네시아 같은 곳에서 민족주의란, 영토 안에 피식민지인 모두를 포괄하는 광의의 민족주의로 전근대의 모순과 식민지 모순을 동시에 극복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기획이 넘아야 할 장애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민족주의 지도자들 안에서도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무슬림의 입장이 날카롭게 충돌했다. 수카르노는 이런 상충하는 세력이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수사법을 구사하며 국민당을 창당하고 반식민주의 세력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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