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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onde de Torrefiel <Ultraficción nr. 1> 본문

Review

El Conde de Torrefiel <Ultraficción nr. 1>

Time Fold 2024. 8. 17. 22:29

2023.09.08, Paris Festival d'Automne

공연은 파리 외곽의 한 공원에서, 해질녘에 열렸다. 
공연에 나온 한 대사처럼, 해질녘은 낮이라는 일의 세계와 밤이라는 꿈의 세계가 중첩되는 시간이다.
바로 옆은 조깅하는 사람들, 놀이터에 놀러온 아이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가득 메운 "현실"의 공간인데,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은 그 현실 위에 트레이싱지처럼 한겹씩 겹쳐지는 여러 층위의 "픽션"을 만나게 된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Good night, Alright>처럼 여기서도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스크린 위에 큰 자막 텍스트로 전달될 뿐이다.
터키에서 이스라엘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나, (지금 이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공원) 바로 옆에서 열린 서커스 공연의 뒷풀이 파티처럼 소소한 에피소드들이다. 하지만 현실에 닻을 내리고 있는 이 이야기들은 한끗 차이로 픽션이 되는데, 이를테면 이스라엘은 중동분쟁에 지쳐 아르헨티나 부근에 새로운 제2의 이스라엘을 건설했고, 그에 따라 남미 대륙에 반유대주의가 확산되고 있다는 설정이나, 서커스 공연의 뒷풀이에서 화장실에 갔던 한 여자 아이가 숲에서 길을 잃는 등의 상황 등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 속에서 현실은 결코 완전히 지워지는 법이 없다. 끊임없이 2023년 9월 9일 파리의 공원에서, 파리가을페스티벌의 일환으로 한 스페인 극단의 공연이 열리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공연을 픽션으로 간주하고 보고 있는 관객이라는 메타적 "팩트"가 환기된다. 하지만 실제로 스크린 밖 현실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것은 그 어떤 허구보다도 더 허구적인 상황들이다. 스크린 뒤를 메우고 있는 숲이 갑자기 비트에 맞춰 춤을 추고, 포그가 스크린 뒤를 메우며 비행기가 날고 있는 구름이 펼쳐지기도 하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살아 있는 양떼가 우르르 관객들 사이를 지나가는 환각에 가까운 장면도 있다. 작품은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흐리게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둘을 역전시킨다. 스크린에서 전달되는 이야기는 현실에 가깝고, 현실은 오히려 픽션에 가까운 기묘한 전복이 일어는 것이다. 
이 전복은 엘 콘데 데 토레필 답지 않게 (여전히 멜랑콜리하고 시니컬하지만) 묘하게 희망적이다. "자연에서 스크린이나 프레임처럼 완전히 네모난 것은 없어. 그것은 언제나 유동적이고 언제나 변화하는 무정형의 흐름인데, 그것을 네모 안으로 포착하는 것은 인간의 픽션이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실제로 작품은 조명이나 포그 머신처럼 전통적인 연극 장치를 이용하면서도 (기존의 연극처럼 현실을 재현하거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신) 얼마든지 이 현실이 다른 프레임으로 포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성공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감각과는 다른 형태로 현실이 렌더링되는 경험을 만들어낸다. 픽션의 이름을 빌어 현실을 다른 네모로 포착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에피소드들이 저마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첨예한 이슈들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복의 가능성은 실천적인 함의를 획득한다. 정치적인 분쟁부터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당장 우리가 눈 앞에 산재한 과제들이 넌지시 언급되지만 그 결말은 늘 열린 채 남아 있다. 작가들이 주장하는대로 현실을 다른 "네모"로 포착할 수 있다면, 이제 그것을 "어떻게" 다른 네모로 포착할 것인지는 관객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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